2002년이 저물고 있다. 회한과 기쁨이 교차됐던 수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여중생 사망사건과 반미시위'는 가장 의미 있는 현상 중 하나였고,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소파개정'과 '부시 사과'로 집약된 한국 민중의 요구는 결국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며, 전국적인 촛불의 행렬은 그 표상이다. 금단의 벽을향해 내리꽂혔던 촛불의 행렬은 시간이 갈수록 불어나, 오는 31일엔 사상 최대 규모의 인파가 '반미'의 대열에 동참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의 존재에 대한 한국 민중의 자각과 행동의 표출은 반세기만에 한미관계의 지형을 뒤흔드는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미국의 패권에 저항하며 분출하는 한국 민중의 에너지가 자칫 '민족주의'의 협소한 틀로 용해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존재한다. '오노 사건'과 '월드컵 열풍'을 거치며 형성된 현재의 흐름이 '민족적 자존심의 회복'이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한 우려의 배경이다. 주권국가의 국민으로서 불평등한 대외관계를 극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미국의 오만한 세계지배가 단지 한반도 남단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의 반미시위는 민족주의를 넘어 전 지구적 반전평화의 길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한반도 남단의 '반미열풍'은 이제 미국의 전쟁책동에 대한 반대와 세계평화의 호소를 이끌 수 있는 전세계 민중의 희망이다. 2002년의 대미를 장식할 우리의 목소리는 '소파개정 '뿐 아니라 '전쟁반대'와 '미국의 패권전략 반대', 그리고 '세계평화와 동등한 국제관계의 형성'을 촉구하는 함성이 돼야한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암적 존재라는 점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진행한 전쟁과 이른바 '악의 축'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전쟁책동은 미국의 패권전략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올 5월 영국의 한 신문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숨진 사람이 많게는 8천명에 달하고, 폭격에 따른 구호물품 중단 등으로 희생된 생명이 2만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올해 내내 국제사회를 긴장케 했던 이라크와의 전쟁설도 2003년엔 현실이 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걸프전 이후 십수년에 걸친 경제봉쇄에 의해 이라크 사회는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돼 있다. 지난해 이라크의 보건부는 경제제재에 따른 질병과 굶주림으로 인한 5살 이하 영유아 사망률이 1천명당 131명에 달하며, 십여 년 간 어린이를 포함해 2백만명의 이라크 국민들이 숨졌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라크 당국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경제제재에 따른 희생자가 적지 않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제 무력침공을 통해 더 많은 피와 목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의한 전쟁위기가 다른 어느 곳보다도 고조되고 있는 곳은 바로 한반도이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
우리는 미국에게 따져 묻고 싶다. 왜 협상을 할 수 없는가? 갈등의 당사자인 북이 원하는 방법이고, 남한 민중과 국제사회가 원하는 방법이다. 미국의 오랜 경제봉쇄와 전쟁책동이 미국에게는 전략놀음일지 모르나 남북의 민중에게는 민족보전과 평화를 위협하는 핵폭탄같은 일이다. '2개 전쟁 가능성', '비외교적 대응' 등을 운운하는 미국은 무고한 여중생을 장갑차로 뭉개버렸던 일을 한반도 전역에 행사하려는 것인가?
우리는 북한의 핵보유를 반대한다. 북한의 핵개발은 자칫 동북아 전체의 군비증강과 핵개발의 확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평화를 염원하는 전 세계 민중의 기대를 거스르는 일이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핵무기 보유·수출국인 미국이 협상의 여지 없이 '선핵포기'로 북을 윽박지르는 것은 설득력 없는 일이다. 미국의 '전쟁불사'의 아집은 전세계 평화 애호 민중의 '전쟁불가' 투쟁에 직면할 것이다. 2002년을 도도히 흘러온 반미의 물결이 전쟁광 미국을 향한 민중의 선전포고로 폭발할 것임을 미국은 똑똑히 알아야 한다.
- 2246호
- 2002-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