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전의 역사가 남긴 고통의 굴레 속에 갇혀 잊혀져 왔던 원폭2세환우들의 인권문제가 오랜 강요된 침묵의 터널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일본 히로시마 원폭투하 58주년을 하루 앞둔 5일, 건강세상네트워크와 아시아평화인권연대 등 9개 인권사회단체들은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는 원폭2세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국가적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원폭2세환우(患友)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아래 공대위)를 결성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됐던 원자폭탄은 당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간신히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온 생존자들에게도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이라는 고통을 안겨줬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들의 2세 자녀들 가운데서도 혈액장애, 성장발육 장애, 정신질환 등 원폭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원폭이라는 재앙이 대를 이어 피해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
공대위는 "인간다운 삶은 물론 생명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원폭2세환우들은 58년 전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와 그 후 58년 동안의 한국정부의 외면이 얼마나 잔혹한 것이었는지를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다"며 "오랜 세월 질병과 빈곤과 싸우다 소리없이 죽어가야 했던 원폭피해자들의 고통이 후손들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 묵과돼서는 안 된다"며 정부의 시급한 의료·생계지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대물림되는 원폭의 재앙
이날 기자회견에는 원폭2세환우인 김형율 씨도 멀리 부산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참석해 관심을 모았다. 몸무게 37kg의 깡마른 체구에 폐기능의 70%가 손상된 김형률 씨는 현재 '면역글로블린M의 증가를 동반한 면역글로블린결핍증'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 선청적인 면역체계의 결핍으로 유년시절을 갖은 병치레로 보내고 지금까지 모두 15차례나 폐렴이 재발하는 등 고통에 찬 삶을 버텨온 김 씨는 자신의 병이 1945년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어머니에 의한 모체유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 동생이 태어난 지 1년6개월만에 죽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현재 김 씨와 같은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는 원폭2세들은 적게는 수천, 많게는 수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90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진행됐던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서 조사대상 1,932명의 원폭피해자 1세 중 41.4%가 1명 이상의 자녀가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답했고, 4자녀 이상이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도 무려 23.6%에 달했다.
낙인과 차별에 대한 공포가 말문 막아
그럼에도 그동안 원폭피해자 1세는 물론 원폭2세환우들조차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꺼내놓지 못했던 것은 사회적 낙인과 결혼, 취업 등에서의 차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또 원폭피해자들을 '한반도 해방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평화의 제물'로 간주했던 사회 인식, 한반도에 배치된 미국의 핵무기를 북한의 남침을 막아내는 '평화 지킴이'로 믿으면서 핵에 의한 피해 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못하도록 해왔던 냉전적 핵 인식, 그리고 미·일 정부와의 외교관계 악화를 우려한 한국정부의 외면 역시 이들의 존재가 드러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했다.
한국정부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해
공대위는 당시 원폭이라는 잔혹한 살상무기의 표적이 된 원폭피해자들은 결코 '평화의 제물'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일제 식민지 착취의 희생자들이자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던 미국의 전후 세계지배 구상의 희생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폭으로 인한 고통의 대물림 역시 일본과 미국 정부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그러나 공대위는 "이들의 역사적·사회적 고통을 오로지 피해자 개인과 그 가족의 몫으로만 전가시켜 온 한국정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1965년 한일기본협정을 체결할 당시 한국정부가 원폭피해자 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각한 질병으로 정상적인 삶을 꾸려나갈 수 없는 원폭후유증 환자들의 상태를 방치함으로써 그들의 건강권과 인간답게 살 권리를 침해해 왔다는 것이다. 공대위가 이날 국가인권위 진정을 통해 한국정부의 대책마련을 정책권고해 줄 것을 요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향후 공대위는 전국에 흩어져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원폭2세환우들을 조직화하고 이들의 인권실태를 조사해 나가면서 정부의 법적·제도적·외교적 노력을 강하게 촉구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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