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점폐업 상태에 들어갔던 국회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제야 국회의원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시급한 민생현안들을 해결하겠구나 쌍수를 들고 기뻐해야 할 판에, 가난하고 배제된 자들의 마음에는 먹구름이 낀다. 정상화된 국회가 민생현안 처리는 고사하고 우리에게 칼을 빼드는 일부터 하지는 않을까? 이것이 지난 열흘간의 '식물국회'를 바라보며 이들이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렸던 바로 그 이유다.
아니나 다를까. 정상화를 코앞에 둔 지난 3일 국회의장과 4당 총무들은 농민들의 비탄을 뒤로 한 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의 연내 처리부터 합의를 봤다. 파병동의안의 조속 처리를 주문하는 대통령의 요청을 국회가 얼씨구나 받아들여 또 다시 지난 4월의 '참혹한 결정'을 되풀이할까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 남의 생명 빼앗아 내 배 불릴 수 없다는 이들도 밤잠을 설친다.
어디 그뿐인가. 침략전쟁에 힘 보태는 파병 결정을 철회하면 될 것을, 피를 보고서도 기어이 점령군을 보내겠다고 고집하며 이 기회에 국정원의 힘 키우고 국민감시체계 강화하는 법안도 통과를 앞두고 있다. 국민의 안전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테러방지법안이 '대테러대책'이라는 띠를 두르고 일사천리로 국회를 통과할까 민주주의와 인권을 걱정하는 이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힘없는 자들의 마지막 의사표현 수단인 집회와 시위에 족쇄를 채우고 '허가권'을 틀어쥔 경찰 앞에 납작 엎드릴 것을 강요하는 집시법 개악안은 또 어떠한가. '날치기 처리'를 자신의 사명인 양 아는 국회의원들이 이 두 법안에 대해서도 저력을 발휘할까
많은 이들의 가슴은 까맣게 타서 숯덩이가 됐다.
국회가 행정부의 독단과 잘못을 견제하고 바로잡기는커녕 거기에 장단 맞추고 제 잇속만 차린다면, 그것을 어찌 대의제 기구라 부를 수 있을까. 청송 피감호자들의 피와 눈물로 얼룩진 야만의 사회보호법을 역사의 장에서 퇴출시키는 일, 가난한 이들이 차가운 거리로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사회보장예산을 획기적으로 확충하는 일, '인간사냥'의 덫에 걸려든 이주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노동권을 되돌려주는 일,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고 진상을 규명하는 법률들을 시급히 제정하는 일. 국회가 눈 돌리고 귀 열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다. 그것이 대의제 민주주의가 인정받을 수 있는 최저선이다.
많은 이들이 두 눈 부릅뜨고 국회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다. 국회가 2003년 오늘을 기어이 '겨울공화국'으로 만들어 놓을 것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 2471호
- 2003-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