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사이에 전해진 두 가지 소식에 우울함과 희망이 교차한다. 먼저 이라크에서 저항단체에 의하여 납치되었던 필리핀 인질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그리고 이제 막 송두율 교수에 대한 항소심에서 주요 혐의가 부인되면서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리핀의 철군결정을 두고 말이 많다. 테러범들에 대한 굴복이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전쟁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으며 철군 결정은 정당하다는 평도 전해졌다. 철군 결정과 이에 따른 인질의 석방을 바라보는 미국과 필리핀의 시각이 어떻든 간에 이런 소식을 접하는 한국인의 마음은 착잡하다. 역시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되었던 김선일 씨의 피살 소식이 전해진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지만, 김씨 피살에 대한 책임 문제도, 파병의 정당성 문제도 적어도 언론의 관심에서 거의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전해진 필리핀 아로요 대통령의 철군 결정과 그에 이은 인질 석방 소식은 결국 김선일 씨의 죽음을 가져온 것은 대한민국 정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김선일 씨의 피랍 당시 정부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라크 파병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유리한 지위에 있었다. 정부가 신봉하는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김선일 씨를 구하는 것은 물론 이를 통해서 명분 없는 전쟁과 완전히 손을 끊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던 그 순간에 호기롭게 파병강행 확인 방침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이쯤 되면 근거 없는 국익론이나 동맹강화론을 내세워 파병을 강행하려는 이 정부와 그것을 강요하는 미국 자체가 대량살상무기가 아닐까?
파병동의안을 낸 대통령(정부), 그것을 가결시킨 국회, 파병결정이 통치행위라던 헌법재판소, 그리고 여전히 파병 결정 철회 움직임에 등을 돌리고 있는 17대 국회의원들은 모두가 '공공의 적'이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권력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이런 행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와 비교해 보면 송두율 교수 항소심 판결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조그만 희망이다. 비록 일부 유죄가 인정되었지만 사실상 이 사건의 핵심이었던 정치국 후보위원 부분과 송 교수의 저술활동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송 교수의 귀국 후 구속과 전향 강요 등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보여준 행태 자체가 국가보안법에 대한 청산 절차의 개시를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 파산선고로 가는 중요한 문턱을 넘어선 느낌이다. 검찰이 즉각 상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조차 국가보안법의 최종적 파산선고의 길을 연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행여 대법원이 또 한번 파산선고를 미룬다 해도, 이제는 주권자인 국민이 나서서 국가보안법의 사망을 선고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덥다. 10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라고 한다. 파병 철회와 국가보안법 폐지라면 이 여름도 정말 시원해지지 않을까?
◎ 김종서 님은 배재대학교 법학부 교수입니다.
- 2619호
- 김종서
- 2004-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