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깨우는 혼과 정성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오늘로 <인권하루소식>의 '팩스'시대가 끝난다. 여러 기억이 밀려든다. <인권하루소식>이 나오던 첫날, 국보법 폐지 농성장으로 빼곡하게 글씨가 들어찬 시커먼 팩스용지를 흔들어대며 달려오던 사람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팩스신문의 초창기 시절, 활동가가 출근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인권하루소식>을 밤새 만들고 쓰러진 사람들의 뒤를 이어 팩스에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일이었다. 잘 들어가지 않는 번호일 경우 네다섯 번씩 재발송해야 했다. 새벽 4-5시경에 발송되는 팩스 때문에 24시간 근무체계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았고, 사무실의 전화는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울려댔다. 오죽하면 '하루소식은 114'라는 농담도 오고갔다. 이사 다닐 때마다 재산 목록 1호로 조심스레 옮긴 것이 팩스였고 그간 혹사당해 수명을 다한 팩스가 여러 대다. 동고동락했던 팩스가 수차례의 수리 끝에 결국 사랑방에서 내보내질 때마다 정든 이와 헤어지는 듯한 가슴 시림을 느끼기도 했다.
1993년 '인권전문팩스신문'을 창간하게 된 것은 '문민정부'라는 허울좋은 말에 온 언론이 취해 돌아가면서 인권문제는 만사해결되었다는 근거 없는 청산주의가 판을 쳤기 때문이다. 양심수로만 얘기되는 좁디좁은 인권의 개념을 확장하고 재해석할 매체가 필요하다는 고민도 컸다. 그러던 어느날, 사무실 책상 위에서 잠자던 한 인권운동가가 사라졌다. 장기수와 관련된 일을 했다는 '과거'에 걸려 남영동으로 끌려간 것. 그를 구명하기 위해 하루에 몇 차례 씩 사건 속보를 만들어 알만한 모든 곳에 팩스를 날렸다. 기다렸다는 듯 청와대와 안기부로 세계 곳곳의 항의서한이 날아들었고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정황을 물어왔다. '세계 유일의 팩스신문이자 인권일간지'란 평가를 받은 기획은 이런 경험을 통해 탄생했다. 당시 빠르게 보급된 팩스가 기획으로만 존재했던 인권신문의 '배달'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어떤 조간신문보다도 먼저 돌돌 말린 팩스신문이 배달되었고, 같은 사건이라도 인권의 시각으로 보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주 5일 만들어지는 소식은 그 속보성에서 뿐만 아니라 인권운동의 역사를 기록하는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인권신문의 역할도 달라지게 됐다. 이제 인권사건에 대한 단순보도를 넘어 깊은 분석과 해석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그러나 두 장의 팩스신문에 가까스로 우겨 넣어야 하는 내용으로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어렵게 됐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속보성 보다는 인권의 시각을 전하는 일이 더 큰 임무가 됐다.
고심 끝에 분량과 편집의 제약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팩스신문의 틀을 벗어 던지는 대신 하루소식의 깊이를 더 파기로 한 것이다. 팩스 시대를 넘는 것은 전달 도구의 변화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인권인식과 요구가 달라진 것을 뜻한다. 외면 받던 인권이 사회주류층의 언어가 되고 인권담론이 양적으로 증대되면서 인권의 시각 찾기가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레토릭이 아닌 진짜 인권이 모색해야 하는 대안에 대한 요구, 민중운동과 인권이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새벽 돌돌 말린 팩스신문에 담았던 혼과 성의를 똑같이 다른 매체에 담아갈 것이다. <인권하루소식>의 사명은 여전히 변함 없기 때문이다. 사무실 벽에 팩스 <인권하루소식>을 곱게 꽂아 두었던 여러 단체의 활동가들, 깨알같은 편집에 읽기 어려운 팩스를 소중히 다뤄줬던 모든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더 깊고 넓은 길을 헤쳐가야 할 인터넷 <인권하루소식>의 시대에도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