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오는 감염인 막고 감염된 외국인 내보내
한국의 외국인 대상 에이즈 정책은, 들어오는 감염인은 막고 감염된 외국인은 내보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감염사실이 밝혀진 외국인에 대해서는 어떤 치료도 보장하지 않은 채 강제퇴거시키고 있어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5월 20일 유필우 의원(열린우리당), 국제이주기구와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이 공동으로 주최한 '주한 외국인 대상 HIV/AIDS 정책세미나'에서는 주무부처인 법무부와 질병관리본부의 담당자에게 감염인이나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사람들의 비판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모든 나라가 입국을 금지하지는 않아
에이즈가 해외에서 들어오는 질병이라는 인식에 토대를 두고 정책이 만들어진 탓도 있지만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HIV감염인(아래 감염인)에 대한 편견이 뿌리깊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정책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정서까지 더해져 감염인에 대한 한국의 출입국 관리정책은 심각한 인권침해 요소를 담고 있다.
주제발표를 맡은 이정환 교수(청주대 사회학)의 연구는 "전세계적으로 HIV 감염인의 단기체류 입국을 허가하지 않는 나라는 10개국에 불과"하며 일본, 독일, 핀란드 등 장기체류를 목적으로 입국하는 외국인에게 HIV 검사결과를 요구하지 않는 나라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더욱 많은 나라들이 입국 후 발견된 감염인의 체류를 허용하며 체류 외국인에 대해 HIV 검사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유엔에이즈(UNAIDS)와 국제이주기구가 2004년 6월 발표한 성명서는 "HIV/AIDS를 여행과 관련하여 공중보건에 위협이 되는 사항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다. 많은 국가들이 공중보건을 지키고 자국민이 아닌 사람 때문에 사회복지비용이 드는 부담을 막겠다는 이유로 감염인의 여행을 제한하지만 감염인이 입국한다는 사실만으로 공중의 감염위험이 높아지지는 않으며 개인의 건강상태를 이유로 입국과 체류에 관한 동등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 또한 세계보건기구와 UNAIDS의 권고는 HIV/AIDS와 관련된 여행제한이 오히려 "비용도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효과도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논리가 궁색하지만 입국 금지?
한국은 출입국관리법 제11조 1항에서 전염병환자의 입국을 금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날 패널토의에 참석한 법무부 체류심사과의 박재완 사무관은 "90일 미만의 단기체류자는 실제로 검사결과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다만, 장기체류자 중 예술흥행사증(E-6비자)으로 입국하는 사람과 산업연수, 비전문취업을 위한 입국자들은 감염여부를 확인하고 있으며 각종 지침을 통해 체류하는 동안 강제검진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또한 검사를 통해 감염이 확인된 사람은 "자진출국을 유도"한다고 말했다.
HIV감염 여부로 국경 이동에 제한을 두는 것은 명백한 차별인데도 박 사무관은 "논리가 궁색하지만 국민들의 인식이 좋지 않아 불가피하다"고 말해 인권의식의 바닥을 보여주었다. 왠지 불안하니까 입국을 금지한다는 것. 물론 공중의 건강을 위해 불가피하게 인권을 제약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건강권에 대한 유엔 사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 14는 이런 경우를 부정하지 않되, 인권제약에 대한 국제적 기준이라고 여겨지는 시라쿠사 원칙(The Siracusa Principles)에 맞춰, 법을 통해 최소한으로만 제한할 수 있으며 제약의 근거를 국가가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박 사무관은 심지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인종차별적인 발상을 드러내 참가자들의 빈축을 샀다.
죽음을 부르는 강제퇴거정책
체류 외국인에 대한 임의적인 강제검진뿐만 아니라 감염사실이 확인된 외국인에 대한 강제퇴거조치도 문제다. 청중석에 있던 한국이주노동자건강협회의 한 활동가는 "나이지리아 국적의 한 이주노동자가 감염사실이 드러난 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강제출국을 당했는데 비행기로 귀향하던 중 사망"한 사례를 소개하여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인권의 실현을 위한 국가의 의무는 자국민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의 관할권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한국정부는 이주노동자의 건강권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강제퇴거정책이 출입국관리법에 규정된 국가권력의 행사이기는 하지만 입국금지사유를 정하고 그에 해당하는 외국인을 강제로 출국시키는 법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중요하다.
자국민 인권침해 있으니 차별 아니다?
E-6비자로 입국하는 사람에게 HIV검사를 요구하는 것은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8조에 따른 것이다. 질병관리본부의 홍순구 에이즈결핵관리과장은 "E-6비자로 입국하는 사람에 대한 검진조항은 '공중과 접촉이 많은 업소에 종사'하는 한국인에 대한 검진조항과 비슷한 것이라 특별히 차별적인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성매매에 종사할 것으로 여겨지는 집단에 대한 강제검진이라고 해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강제검진조항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심한 발언이다. 아름다운 재단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의 한 변호사가 지적했듯이 HIV검사를 강제할 수 있는 경우는 수혈이나 장기이식과 같이 의학적 타당성이 있는 경우로 제한되어야 한다. 강제검진이란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신체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익명검사체계 필요
익명검사에 대한 질병관리본부의 인식 역시 인권에 대한 존중이 보이지 않는다. 패널로 참석한 국제이주기구 한국사무소 고현웅 소장은 "자발적이고 익명이 보장되는 상담 및 검사가 확대 보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보건소를 통한 익명검사에 자국민과 외국인의 차별은 없다. 익명으로 검사를 받더라도 실명으로 신고를 하기 때문에 익명검사의 실질적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홍 과장은 "환자를 지원하려면 실명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지원을 원하지 않는 감염인은 신고하지 않을 수 있다"는 답변을 했다. 많은 나라들이 이미 오래전에 실명신고체계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익명을 보장하면서도 모든 감염인을 지원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에 힘써왔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감염인들이 감시를 받는 것 같다며 정부에 알리지 말라고 한다"며 감염인쉼터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전한 현실을 보라. 질병관리본부의 답변은 실명으로 신고하기 싫으면 혼자 앓으면 그만이라는 무책임함일 뿐이다. 외국인에 대한 에이즈정책의 인권침해적 요소들은 에이즈정책 전반의 문제와 닿아있음이 분명해진다.
한국정부, 인권침해라는 것조차 인식 못해
이날 토론은 에이즈에 대한 한국정부의 인식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공중보건을 위해 불가피한 수준을 넘어서는 강제검진이나 개인의 건강상태를 이유로 거주이전과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HIV감염여부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 심각한 인권침해이며 그에 대한 시급한 개선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이 강제퇴거조치를 두려워해 HIV 검사를 기피하는 경향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는 점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자신의 몸의 이상을 확인하고 인지하는 것이 건강을 누리기 위한 기본 단계라는 점에서, 건강과 직결된 정책이 건강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기막힌 현실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아직 국민들이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어 법이나 제도가 앞서가기 힘들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익명검사나 강제퇴거정책의 폐지가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앞서가는 것도 아닐뿐더러 정책 담당자들의 편견이 오히려 심각하다는 것을, 이날 세미나는 보여주었다.
감염인의 참여 아쉬워
이날 세미나는 참석자들의 열띤 토론으로 외국인에 대한 에이즈정책의 문제점을 낱낱이 짚어볼 수 있었고 한국의 에이즈정책의 근본적인 검토가 시급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감염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 에이즈정책의 인권불감증 때문에 감염인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발언하기 힘든 현실 또한 드러난 것이다. 자신과 관련된 정책에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본을 되새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