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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움틈] 세계여성행진,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아래로부터의 연대'

7월 3일 서울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세계여성행진과 함께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행진'

▲ 7월 3일 서울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세계여성행진과 함께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행진'



여성들이 살만해졌다고?

요즘 여성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이 시대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로 공전의 히트를 치는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그러나 김삼순의 현실은 사실 많은 여성들과 차이가 있다. 삼순이는 남다른 능력과 자신감을 겸비했을 뿐 아니라, 요즘같은 실업과 불경기의 시대에 그렇게 얻기 힘든 직장도 사랑 때문에 차버리고 나올 수 있는 용기백배한(?) 여성이지만 다수의 여성들은 자신의 미래가 불안하고 먹고살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신입사원>의 미옥이들이 되어 불리한 노동조건에도 불구하고 '찍소리'없이 일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현재 한국의 여성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더욱 심한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IMF 당시보다 더 먹고살기 힘들어진 지금, 대다수 여성들은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에 시달리고 있다. 비정규직의 70%가 여성노동자라는 말은 이제 귀에 못이 박힐 이야기이고, 이들의 임금이 정규직 남성노동자 월 평균 임금인 202만원의 38%인 77만원도 채 못받고 있다는 현실도 식상한 것에 지나지 않을 만큼 널려진 사실이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종묘까지 진행된 행진

▲ 마로니에 공원에서 종묘까지 진행된 행진



이러한 여성들의 현실에 주목하며 여성들의 삶을 계속해서 빈곤과 폭력속에 놓이게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행진이 지난 7월 3∼4일 이틀에 걸쳐 한국에서 진행되었다. 이 행진의 공식 명칭은 '세계여성행진'(World March of Women, www.marchemondiale.org/en)으로 '빈곤의 여성화',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를 주요 의제로 내걸고 세계화 반대 운동에서 여성들의 의제를 결합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세계여성행진은 전 지구를 횡단하는 릴레이 여성행진으로 각 대륙을 걸쳐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퀼트'와 '인류를 위한 세계 여성 헌장'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건너오며 진행되었다. 퀼트와 헌장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성들의 릴레이 행진을 이어나가기 위한 매개이자, 전세계 여성들의 서로 다르면서도 공통된 목소리 그 자체이기도 하다. '2005여성행진'은 각 국 여성들의 요구를 담은 퀼트를 이어 거대한 패치워크를 완성하는 공동행동을 중심으로 하며 지난 3월 8일을 시작으로 세계빈곤퇴치의 날인 10월 17일 세계 최빈국인 아프리카대륙의 부르키나 파소에서 마무리 될 예정이다. 2000년에도 세계여성행진이 있었지만 한국의 여성운동들이 보다 본격적으로 직접적인 행동으로 참여한 것은 올해가 원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종묘까지 진행된 행진

▲ 마로니에 공원에서 종묘까지 진행된 행진



여성운동의 국제연대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사고

이제까지 여성운동의 국제연대는 유엔 주도의 세계여성회의를 큰 축으로 두고 이루어져왔다. 이 회의는 여성차별철폐협약, 북경여성행동강령 등 중요한 협약을 만들고 이를 각 국의 정책으로 반영토록 압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실제로 제도적 측면에서 성평등을 달성하는데 커다란 성과를 보이며 여성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맹아를 낳았다. 하지만 1995년 북경여성회의 이후 전세계 여성운동의 주요목표가 된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전략을 통해 여성운동이 여성들의 사회 주류세력으로의 진입에 목표를 두는 동안, 기층여성들의 삶의 문제를 가지고 정부와 전면적 전선은 형성하지 못하였다. 성평등의 '제도화'는 결국 그 사회의 존립양식 안에 머물게 되며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을 가로막는 한계로 귀결되었다. 현재 성주류화 전략에 입각한 '양성평등' 제도들은 곧 남성적 권력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그 체계 안에 좀더 많은 수의 여성을 승차시키는 전략으로 추락해 가고 있다. 여성부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가정과 직장의 양립'을 통한 여성노동력의 적극적인 노동시장 진출 전략은 바로 이러한 측면의 결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현재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여성 노동의 비정규직화, 여성의 빈곤화, 여성의 양극화와 같은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결과이자, 성주류화 전략을 중심에 놓은 현재 여성운동의 국제주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세계여성행진은 자본주의과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국제연대를 몸소 실천하겠다는 여성들의 의지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을 담아내고 있다. 세계여성행진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지구적 경제체제와 가부장제라는 사회정치적 체제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빈곤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고 규정한다. 가부장제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갖지만, 자본의 세계화로 더욱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체제는 상호 작용을 통해 더욱 강화하면서 여성의 경제적 주변화, 문화적 열등함, 여성 육체의 시장화와 상품화와 같은 사회적 가치절하를 초래한다는 분석에 기초하여 세계여성행진은 여성의 '빈곤'과 '폭력'에 초점을 맞추어 현 체제에 전면적인 도전장을 내고 있으며,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고 '직접적인 저항'을 조직화하고 있다.


세계여성행진, 새로운 저항의 공간

세계여성행진의 주요 관심은 지금의 자본 위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는 새로운 세계는 유토피아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세계여성행진이 바라는 것은 인류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제반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 즉 이러한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현실화하는 실천적인 활동이다. 세계여성행진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그것이 '상층 중심' 내지는 '국제회의 중심'의 국제연대가 아닌 '운동'이라는 것이고, 풀뿌리 여성들이 조직되어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연대와 투쟁을 지향하고 실천한다는 점이다. 또한 일회적 행사가 아니라 계속되는 연대투쟁이라는 점이다. 세계여성행진이 행진의 형태로 외화된 것은 2000년 이후 5년만이지만 '운동'이 공백이었던 것은 아니다. 세계여성행진은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끊임없이 소통되고, 이를 통해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모아가고 있으며, 여기에 참여하고자 하는 풀뿌리 여성조직들이 각 국에서 날로 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번에 세계여성행진이 두 축에서 진행되었는데 이 중 '세계여성행진과 함께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행진'(womenmarch.jinbo.net)에 속한 단체 혹은 여성 개인들의 새로운 조직적 참여가 바로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세계여성행진은 다양한 세력과 적극적으로 연대하면서도 운동 내 차별과 배제에 끊임없이 투쟁을 한다는 점, 국경과 문화를 가로지르는 행진의 형태에서 새로운 국제주의 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로운 연대의 실천에 중요한 장이다. 세계여성행진은 160개국 6,000여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만큼 그 내의 입장과 지향이 다양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논의하고 그러면서 중심적인 의제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하지만 그들의 계급과 각국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서 다른 여성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세계여성행진은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며 제3세계 여성들의 관점과 그들의 목소리를 더욱 중심에 놓으려 한다. 세계여성행진이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운동의 의제를 조직하려는 이러한 페미니스트적 사고는 탈중앙화·탈집중화 전략에도 잘 드러난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시작한 세계여성행진

▲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시작한 세계여성행진



다양한 여성들의 다층위의 이해와 요구가 만나는 곳, 세계여성행진

2005년 여성행진은 역사적인 3월 8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시작했다. 브라질에 3만 여명이 모여 행진을 발족하였으며, 아르헨티나·볼리비아·페루·에콰도르·콜롬비아·아이티·쿠바 등 남미 전역을 가로질렀다. 중남미 상당 부분의 경우, 빈민층 다수가 원주민이자 농민이고 또 그 가운데 가장 빈곤하고 각종 폭력에 노출된 집단이 여성이다. 농촌이 붕괴하고 남성들이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나서자 많은 농민 또는 농업노동자 여성들은 남아서 이중 삼중의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여성행진이 중남미를 중심으로 시작된 것은 바로 이렇게 더욱 차별적 현실에 위치한 여성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여성의 요구를 조직해가려는 세계여성행진의 새로운 국제주의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중남미 여성들은 최저임금 보장 및 노동기본권, 안전한 낙태에의 권리, 토지개혁과 원주민 여성들을 위한 기본권을 요구하였으며, 폭력, 전쟁과 인종차별의 종식을 요구하였다. 특히 '자유무역'이란 미명 하에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3개국 여성들이 모여 여성행진을 진행하는 모습

▲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3개국 여성들이 모여 여성행진을 진행하는 모습



터키에서의 여성행진은 터키의 전설과 전통 이면에 숨겨져 있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고발하였다. 터키에 '1000년 전 한 왕이 딸을 뱀에 물리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바다 한 가운데 있는 탐 꼭대기에 가두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런 전설이 상징하는 '여성유폐'가 오늘날 계속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해상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여전히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는 '명예살인'이나 '처녀성 실험' 등 인권유린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도 높았다. 또한 200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남편의 동의 없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된 여성노동자들 3,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갖고 경제, 정치, 사회 제 영역에서의 여성배제와 이를 재생산하는 현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이는 일찍이 성주류화를 이뤄온 제1세계 여성들의 의제가 되기엔 부족해도 정치, 사회적 권리에서 제대로된 시민권을 누릴 수 없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성주류화 전략의 한계를 들어 비판하기보다는 권리로서 포함시켜 가는 것이 바로 연대에서 서로의 차이 속에 공동의 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3개국 여성들이 모여 여성행진을 진행하는 모습

▲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3개국 여성들이 모여 여성행진을 진행하는 모습



그리스에서는 실업과 가정폭력, 인근 사이프러스에서는 분쟁 종식이 여성행진의 주요 의제였으며, 전통적인 가톨릭 윤리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의료 지원을 받는 출산'을 범죄화하는 국민투표에 대항하는 집회가 개최되었다. 포르투갈에서는 낙태금지정책이 많은 공격을 받았으며, 동성애자 인권도 제기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최근 대중적 저항에 봉착한 유럽연합 헌법과 각종 정책을 주된 대상으로 삼았으며, 유럽 대륙 여성들 간 연대를 강조했다.

2004년 12월 10일 '인류를 위한 지구적 헌장'이 채택되었다. 29개 국가가 이 헌장 채택의 장에 있었는데, 3개국은 투표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낙태 관련한 문제에서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입장의 배제는 아니다. 다른 입장이 존중되고 계속적인 토론과 논쟁을 통해 합의의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여성행진의 정신이다.

한국에서도 '인류를 위한 지구적 헌장'에 새롭게 문제제기하는 여성들이 있다. 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가 바로 그것인데, 지난 6월 29일 결성된 전국성노동자준비위원회(전국성노위)는 2004년 세계여성행진 총회에서 채택한 이 헌장의 일부 조항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세계여성행진 측에 시정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국성노위는 성명에서 한국에서는 성매매 특별법으로 인해 범죄적 성매매인 '강제적 성매매(sex trafficking)'와 '자발적 성노동(sex working)'이 동일시되어 현실의 성노동자들을 억압한다는 입장을 제기하며 '인류를 위한 지구적 헌장'의 각 조항에 자신들의 견해를 첨부하여 성노동자들의 입장을 표명했다. 아마 이는 세계여성행진에서 논의될 것이며, 각 국 여성이 처한 상황에 기반해 여성들의 요구를 만들어가는 정신에 비추어볼때 페미니즘의 교조적·근본적 관점보다는 여성들의 삶에 기반한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에서 논의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이는 반드시 여성행진에서 이러한 입장이 관철될 것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문제는 이것이 단절이나 서로의 배제가 아니라 논의되고 토론되며 실천의 내용으로 만들어져왔던 기존의 방식으로 갈 것이라는 기대를 말한다.

세계여성행진은 이론에 중독되어 이론을 현실화하려는 근본주의 운동이 아니다.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의제를 가지고 실천을 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그러다보니 세계여성행진에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한 투쟁의 내용은 여성들의 삶의 조건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쟁점을 통해 계속해서 재사고되고 변화되어 간다.

끝으로, 한국에서도 여성행진이 진행되며 국내 여성단체 간의 의제에 관한 입장차이로 따로 진행되었지만 이것은 단절이 아니다. 우리 다음으로 퀼트를 이어간 필리핀의 경우도 서로 다른 의제를 가진 여성조직이 각자의 요구를 담아서 퀼트를 제작했다고 한다. 세계여성행진의 정신에 맞추어 계속적인 쟁점의 토의를 거치려 노력할 것이며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바로 세계여성행진의 정신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덧붙임

정주연 님은 '세계화 반대 여성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