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1일 만들어진 후 현재까지 50년이 넘도록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50년 동안 국가보안법은, 때로는 친미 반민족 정권을 위해 복무했고 때로는 유신정권을 유지하는 데 이용됐다. 또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수많은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빨갱이’로 낙인찍으며 민주화에 대한 전민중의 열망을 억압하는 데 이용됐고, 소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지나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국민들의 생각을 검열하고 있다. 무려 반세기에 이르는 동안 사람들의 머릿속 한 귀퉁이에 자리잡아온 국가보안법, 이젠 좀 없어져주면 안될까?
‘국가보안법 폐지’는 아주 오랫동안 민중운동 진영의 요구였다. 처음 민중운동 진영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북쪽에 ‘빨갱이 집단’이 있는 한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국가보안법 폐지’는 북의 주장이기 때문에 남에서 똑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간첩들’이라는 것도 그들의 주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작 민중운동 진영도 “표현의 자유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는 정치적 ‘표현’들이 도리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국가보안법 폐지는 요원한 일인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덧 세월은 흐르고 흘러 이제는 저 국회에서도 ‘국가보안법 폐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물론 국가보안법 폐지의 이유는 같지 않지만. 국회에 있는 다수의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단기 목표로 결정하면서 세상의 이목도 국회로 집중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수구 보수세력을 의식해서인지, 국가보안법 폐지 이후 “어떤 시민이 시청 앞에서 인공기를 흔들며 ‘김일성 만세’를 외침으로써 국가안보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이 올 것”을 스스로 걱정해서인지 굳이 ‘폐지’ 이후 형법이나 대체입법으로 보완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편 국회 내외를 아울러 ‘대표악법인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장강의 거대한 물결처럼 이어지면서 수구 보수세력들의 엉덩이에도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금세 이 나라가 ‘적화통일’이라도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고 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비정상적으로 50년 이상 동안 누려온 기득권을 빼앗기는 것에 대한 ‘가열찬’ 몸부림일 것이다. ‘한국 사회의 원로’라고 자처하는 할아버지?할머니들이 한 손에는 민중들의 피를 묻힌 채 “국가보안법 死守”를 목에 핏대 세우며 외치고 있고, 거대 야당과 공룡언론들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국가보안법이 없어지면 무슨 ‘빨갱이 세상’이라도 도래할 듯 소설을 쓰며 걱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격화될수록 ‘국가보안법 폐지’가 국회 내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만의 ‘자유를 향한 투쟁’인 것처럼 보이는 이 현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다 스스로 국가보안법에 의해 모든 자유를 억압당하기까지 하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줏대있게 외쳐온 민중진영의 목소리는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칫날 상 차린 사람은 따로 있는데 손님으로 와서 주인 행세하는 사람은 또 따로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인가?
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청)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전국도보행진’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은 특별한 기대로 다가왔다. 한청 의장과 집행위원장이 중심이 되어 각 지역의 청년단체들과 함께 전국 1,350여km를 행진하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알려나가겠다는 취지였다. 말이 1,350km이지 난 과연 50km라도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 인권단체들도 부분적으로 ‘도보행진’에 결합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8월 28일 인권단체들과 함께 하는 충주~원주 구간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난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28일 오전 11시 버스터미널에서 인권단체 활동가들을 만나 충주로 출발했다. 오후가 훌쩍 넘어 도착한 충주에서는 ‘나눠먹기식 수도 이전, 충주에도 나눠주라’는 현수막이 우리를 맞이했고 충주에서 행진이 출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우리는 또 한참을 차를 타고 가야 했다. ‘이러다 거의 원주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드디어 행진단을 만났다. 행진단은 생각보다 초라해보였다. 매년 TV에서 ‘박카스 국토순례’를 보며 ‘전국도보행진’을 접해왔던 나로서는 약간의 실망감이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행진단원들은 모두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특히 한 달 이상 행진을 계속해온 전상봉 의장과 이승호 집행위원장은 피곤하고 힘들 법도 했지만 까맣게 탄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영을 표시했다. 그들은 동지를 새로 얻은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난 걷는 내내 ‘과연 우리가 행진단에게 아니, 우리의 행진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의 주도권이 고스란히 정치권으로 넘어가는 것이 억울해서라도 행진에 참가하는 동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권하루소식 편집장들은 나에게 ‘전국도보행진 취재’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기기도 했으니 난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행진을 하는 내내 열심히 취재에 임했다. “인권하루소식 기자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뭐냐”고 물으면 “인터뷰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작정인 나였지만 이번 인터뷰는 피해갈 수 없었다. 행진하는 내내 행진단 인터뷰를 하며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렇게 약 4시간 정도 걷고 나서 행진단은 원주에 도착했다. 해는 이미 뉘엿뉘엿 산을 넘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채 둘러앉아 평가를 진행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행진단이 이미 새벽 6시경부터 행진을 시작했고 우린 그날 행진의 1/3 정도밖에 참가하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날 행진에 결합하기 위해 이미 전날 밤에 충주로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우리들은 무슨 대단한 일 한답시고 가서 겨우 1/3을 그들과 함께 했다.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인터뷰한다며 행진단원들을 귀찮게 한 것도 생각나 한꺼번에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래, 결국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묵묵히 계속 밀어왔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심가지지 않을 때, 시기상조라거나 정치권의 화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민중운동 활동가들 중 누군가는 그렇게 제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이번 도보행진을 추진한 한청은 지난 7월 21일 법원에 의해 이적단체로 지목됐다. 국가보안법 상 한청 의장과 집행위원장 뿐만 아니라 대중단체 협의체인 한청 소속 단체 회원들은 모두 이적단체 회원으로서 국가보안법 위반자일 수 있다. 그날 행진에 참가한 민족통일애국청년회 소속 김규성 씨는 이미 2001년 단국대 조작사건으로 국가보안법에 희생된 적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됐던 김 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도 올해 4월에는 집행유예 중이라 투표권이 없어 총선 투표에 참가하지도 못했다. 그는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이 자신에겐 ‘생존권 투쟁’이라고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또 행진단과 함께 한 최종대 할아버지도 인상적이었다. 평화통일시민연대에서 활동하시는 최종대 할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69세였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어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걷고 있다”면서도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해가 지고 컴컴해진 이후에야 우리는 서울로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원주에 ‘국가보안법 폐지의 동지’들을 남겨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울 수만은 없었다. 멀리서라도 행진단에게 항상 힘껏 박수를 쳐주리라고 다짐하며 돌아서는 길에 문자메시지 한 통이 와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 도보행진은 기사화하지 않을 예정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행진에 참가하고 와라-편집장” 어흑...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