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고3으로서 수능시험을 친 겨울 어느 날 인권운동사랑방을 찾았다. 입시공부를 하면서 진보적인 매체가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한줄기 빛처럼 여기면서 꼼꼼히 정독을 하던 ‘여성신문’의 홍보기사를 보고 ‘대학교에 가면 꼭 가보마’ 했던 인권영화제. 상영작을 관람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직접 영화제를 만들 수 있다니,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런데 정작 작년에는 상영 당일에 티셔츠를 팔고, 학교 다니고 하느라 영화는 별로 못 봤다. 올해는 2년차이다 보니 아무래도 준비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홍보와 자막 넣기, 국내프로그램 시사, 감독과 개별 연락, 해설책자 집필 등. 어떤 일은 더 중요하고 어떤 일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만드는 사람들’ 란에 내 이름이 많으니까 기분은 좋았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무수한 뒤풀이 날들이다. 처음엔 내일을 생각하고 잠깐만 앉아 있다가 가야지 하던 자리가 이제는 없으면 왠지 허전한 코스처럼 느껴진다. 조용한 술집에서 도란도란 가족 친지나 또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채울 수 없었던 고민이나 중요한 정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이 많이 오갔다. 지문날인거부자로서의 나를 오롯이 가장 편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공간이기도 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을 강구하는 다른 자원 활동가 언니들을 보면서 몇 년 뒤 있을 나의 독립을 구체적으로 계획해보기도 했다.(이 자리에서 배운 대로 지금은 주택청약부금을 하나 붓고 있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매년 사법고시 합격자수가 교수학생을 통틀어 최고의 관심사인, 학생들은 입학을 하면 으레 당연히 해야 하는 듯이 사법고시에 올인하는 고시학원 같은 곳이다. 친구들 중 대부분은, 입시경쟁에서 줄곧 선두에 있었기에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고, 충실하게 늘 하던 대로 앞서가는 방법을 다들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한 반편향으로 올해는 영화제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살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고 자기소외적이기까지 한 그 공부가 과연 필요한 것인지 원점으로 가서 생각을 해 보기로 했다. 누구나 할 법한 고민을 너무 거창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부끄러운데, 어쨌든 이 고민의 연장선상에 인권운동사랑방이 존재하고 인권영화제는 영상으로 또 일로 나를 콕콕 찌른다.
요즘에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올해 인권영화제 상영작이었던 ‘우리 사이’에서 카메라를 들고 조곤조곤 자기 이야기를 하던 도토리미디어사랑방 아이들이 생각난다. 저 아이에게도 하고 싶은 말, 자기만의 시각이 있겠지.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청소년 성소수자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인권영화제에 출품신청을 하는 감독들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다루었을 텐데’ 하고 비교를 해보기도 한다. ‘기본권론’이라는 수업시간에 언론, 출판의 자유를 배우면서는 영진위의 사전검열제한추천거부 등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아직 영화 자체의 작품성이나 미디어 운동 등에 대해서는 문가에서 쭈뼛거리고 있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의 목소리를 더욱 증폭시키고 큰 울림이 되도록 만들고 있음은 알겠다. 그리고 이 일이 나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 모두가 와글와글 떠들면서 자기 소리를 내는 세상으로 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