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알트, 『생태적 경제기적』, 박진희 옮김, 양문, 2004.3 ♠
프란츠 알트의 <생태적 경제기적>은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은 눈치다. 자연과학이나 환경운동권에서 익히 들어왔던 “생태”라는 말이 감히 “경제”를 수식하고, 게다가 다른 분야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 두 개념이 맞물려 “기적”을 이루어 낸다니 생뚱맞기 이를 데 없다. 적어도 필자처럼 생태학이나 생태학적 가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자, 그럼 알트가 이 생뚱맞음을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 그가 서문에서 말한 “미래의 즐거움을 위한 초대장”을 한번 펴보자.알트가 맨 처음 내놓은 것은 먼 나라 독일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전후 산업혁명으로 경제기적을 일으켜 세계를 놀라게 한 독일이 겪고 있는 대량실업과 생태위기의 문제는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가 현 시점에서 감당해야 할 시급한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는 그 동안 우리가 간과해 왔던 생태적 가치와 경제적 효율성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꾀할 것을 주장한다.
자연환경 파괴의 주범인 화석연료에 치중된 자원의존도는 중동지역에서 계속되는 석유전쟁으로 세계 평화까지 위협할 지경이다. 이에 알트는 무한하고 값싼 태양, 바람, 물, 바이오매스 등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을 소개하며, 에너지 산업의 민주화로 경제민주화는 물론 세계평화까지 꾀하는 발칙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또한 자가용 중심의 교통체계를 철도개혁을 비롯한 대중교통 중심으로 바꾸고, 화학물질의 사용을 억제하고 보다 많은 인력투입을 요구하는 생태농업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뭐, 이쯤은 에너지 절약 공익광고 수준의 이야기들이다. 모두가 동의하고 있지만 절대 부족한 정치적인 용기와 사회적 의지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실천사항들이다. 이처럼 알트가 제시하는 생태적 삶을 위한 다양한 방식의 실천사항들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그가 거듭 강조하는 노동의 생태화이다.
산업혁명 이후로 인류는 끊임없이 일해 왔다.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해치워, 보다 많은 경제적 가치를 산출하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향한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기에, 노동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국엔 성장의 정체현상에서 비롯한 대량실업과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생태위기가 남았을 뿐이다. 노동만이 인간이 해야 할 구실인 양 살아온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에 지쳐 쓰러져가고, 숨 막히는 공기에 질식해가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나 알트는 이 위기의 상황을 성숙을 향한 기회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자본 소비만을 위한 그 동안의 노동 개념에 생태학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산업경제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 그 방법이다. 노동시간 단축, 노동의 유연화1) 등 고전적인 사회전략에 앞서 말했던 환경정책을 결합한 생태적 노동환경은 완전고용도 이루고 생태적 사회체제로의 전환을 촉진시킬 것이다.
알트는 말한다. 지구의 한 쪽에서는 끊임없이 도시건설을 위해 삼림을 파괴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삼림의 축소에 따른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쓰고 있는 이 한심한 노동자들이여,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자의 최후를 이제 알았는가. 이제는 수년간 지속되어 왔던 경제학의 오류를 수정하자. 그 동안 생태학을 경제의 하부구조로 여겨왔던 우리의 삶의 방식을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한 방식으로 바꿔보자. 우리 한번 뒤집어보자.
이 초대장 꽤 받아볼 만하지 않은가?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알트는 "노동시간의 단축은 실업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도기적인 선택의 하나일 뿐"이라며, "노동세계의 유연화, 경제의 생태화(2장 및 3장), 순환경제의 발전(5장), 전지구적인 경제 대신 지역 경제의 창출, 완전히 새로운 경제적 가치기준의 창출, 다시 말해서 자기를 위한 노동·가정을 위한 노동·가족을 위한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어린이와 병약자를 돌보는 일에 보수를 지급하는 것, 그리고 특히 환경을 보호하는 미래기술의 개발은 우리가 수십 년 전에 잃어버린 완전고용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알트가 주장하는 '노동세계의 유연화'는 남녀 50대 50의 가사노동, 남녀 모두의 반나절 직장 등을 통해, 일을 적게 하고 차원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알트가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반대를 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알트가 주장한 '노동세계의 유연화'가 신자유주의적 흐름을 거스르면서도 도달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을 더욱 유연화시킴으로써 달성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책에서는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어쨌거나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이나 '스스로의 노동에 대한 통제권 확보'는 알트나 인권운동이나 공히 지향하고 있는 바, 자본이 아니라 노동이 주도하는 '노동세계의 유연화'가 어떻게 가능한지의 문제는 향후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