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집에서 컴퓨터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은 약 4개월만이고, 집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은 1년 2개월이 조금 더 지났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저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순천향병원 영안실 4층과 명동성당 영안실에 머물러야 했고, 서울구치소의 한 독방에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지난 4월 30일, 오후 3시 갑작스럽게 독방 문이 열렸고, 떠나왔던 사회로 돌아왔습니다. 보석금 5천만 원이라는 거금(물론 보증보험으로 대신했지만)을 납부하고 찾은 자유였습니다. 보석으로 석방되기 하루 전인 4월 29일 네 번째 공판에서는 검찰 측이 증인을 대거 내세우는 바람에 앞으로 상당히 재판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저와 이종회 피고인은 앞으로 최소한 한 달은 더 감옥살이를 해야 보석이라도 결정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구치소 11동 중층 1방에 돌아와 지금까지 벽에 붙여놓았던 달력을 떼어내고 5월 새 달력을 붙여놓았습니다. 5월 한 달 동안의 재판 일정 등을 표시해놓았습니다. 석방에 대한 기대를 접고 착실하게 감옥살이를 할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보석 석방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생일선물로 받은 보석(保釋)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준비 없이 다시 사회로 갑작스럽게 돌아와야 했습니다. 마침 그날은 마흔 아홉 번째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나이로 50살을 맞은 것이지요. 공판날 사랑방 활동가들은 색종이로 생일 축하 펼침막을 만들어 재판장에서 펼쳐보였습니다. 이숙연 판사가 그 펼침막을 보아서 제게 생일선물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한꺼번에 받았고, 집에도 돌아왔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한 번도 깎지 않아 장발이 된 머리도 단정하게 이발했고, 방에 이불을 펴고 누워 잠자고 때로는 늦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오래도록 비워두었던 옥탑방도 정리하고, 고3인 큰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중도 나가고 있습니다. 지하철도 타보고, 은행 일도 보고, 사무실에 나와 회의에도 들어가 보고, 담배도 피우면서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였습니다. 중3인 둘째딸과 배드민턴을 치러 다니고, 아내와 장을 보러 다니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상의 일들을 누구의 감시도 없이, 누구의 허락을 받지 않고 순전히 저의 의지대로 살아내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들인데도 어색하기도 하고, 언뜻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 멈칫하는 모습을 보고는 완전하게 세상에 돌아온 것은 아닌 저를 봅니다. 1년 2개월여라는 갇혀 지냈던 이처럼 일상생활을 제한 당했던 시간들로부터 저는 서서히 사회에 적응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유란 어떤 거창한 이념이나 활동이라기보다는 이런 일상적인 일들을 제한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석 모란공원에 다녀오다 5월 6일 같이 석방된 이종회 선배 등과 마석 모란공원을 다녀왔습니다. ‘용산철거민 열사’들이 355일 만에 장례를 지낼 때 생각이 났습니다.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몸뚱이들, 뒤틀린 사지에 고통이 배어나는 그 몸뚱이들을 우리는 355일 만에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끝내 밝히지 못한 채 몹시도 추운 눈 내리는 겨울날에 장례를 지내야 했던 기억, 마지막 가시는 길을 모시지도 못하고 떠나야 했던 감옥길이었습니다. 새로 떼를 입힌 묘지에 잔디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지요. 그 앞에 술 한 잔씩을 올리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직 그분들이 편히 잠드시지 못할 줄 알면서도 영면하시기를 빌어보았습니다. 그분들이 영면하기 위해서는 산자들이 진상을 규명하고, 억울함을 풀어드려야 하지만 언제나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세월이 흐르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 죽음도 잊힐 것인데, 그 죽음을 기억해야 할 의무를 진 사람들의 몫이 남은 것이지요. 용산 망루투쟁으로 구속되어 있는 철거민들의 항소심 재판이 5월 10일 결심, 그리고 2주쯤 뒤에 선고로 이어지겠지만 항소심도 크게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분들 또한 억울함을 간직한 채 얼마나 긴 세월을 감옥에서 살아가야 할지 모릅니다. 감옥에 그들을 두고 떠나왔기 때문에 저의 석방을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뿐만이 아니죠. 감옥에는 저와 같은 정치범들도 있고, 가난하고 힘이 없기 때문에 구속까지 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감옥의 현실은 구조적인 인권침해가 항상적으로 일어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감옥의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도 바꾼 것 없이 나온 것이라서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다시 활동가로 서기 위해서 감옥에 있을 때 저의 운동 인생 30년, 인권운동 20년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이제 50에 턱걸이를 하는 나이, 운명처럼 받아들인 인권운동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를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름 정리한 것은 ‘관계의 인권론’ ‘생태적 인권운동’이라는 매우 추상적인 것들이지만, 막연하게 품은 이 생각들을 정리하고, 실천으로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이명박 정부의 인권탄압에 맞서서 인권을 옹호하는 투쟁들에 결합하기도 해야겠지만 보다 멀리 보는 운동의 관점과 실천의 방법을 고민하다 왔습니다. 어떤 것이 될지는 몰라도 지금까지의 저의 경험과 고민들을 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한 동안 진행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고, 진보운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과도 많이 만나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배와 감옥살이 때문에 뒤로 미루어두었던 많은 일들을 마무리해야 하고, 용산 진상규명사업을 비롯한 그동안 벌려놓았던 일들도 진행을 시켜야 하지요. 그래서 보면 해야 하는 과제들을 잔뜩 안고 돌아왔다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둘지는 않으려 합니다. 지방선거나 4대강 저지 사업 등이 지금으로서는 긴급한 사안이지만 잠시 지켜만 보려고 합니다. 당장 뛰어들기보다는 앞으로의 방향을 고민하고 정리하는 것이 지금 제게는 더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사회에 적응하기에는 약해빠진 몸도 한동안 추슬러야겠고, 가족들과도 같이 잘 살아보아야겠고, 활동가로 제가 서야 할 자리도 찾아야겠기에 천천히 활동가로의 복귀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저를 걱정해주셨던 분들의 과분한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과정을 충실하게 잘 밟으려 합니다. 그동안 마음으로 함께 해주시고, 격려해주셨던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보다 단단한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서도록 착실히 준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0년 5월 9일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드림. |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