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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사람들] “아직은 좀 더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용산 4구역 철거민 김순옥 씨와 정옥자 씨

김순옥 씨와 정옥자 씨는 용산 4구역에서 이십 년 넘게 나란히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살았다. 그러다 용산 참사를 겪어야 했고 1년여의 투쟁을 함께 했다. 그리고 임시상가에 준하는 함바집 운영권을 용산과 수도권 등 재개발 지역 2곳에 받로 협상했다.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까지 치르고 다 끝나는가 싶던 이들에게, 그 이후는 유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시작이었다. 다른 지역의 철거민 집회와, 본인과 동료들의 재판 때문에 법원을 다니느라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낸다. 이들은 공무집행방해나 폭행 등 갖가지 혐의 계속 재판을 받고 있다. 그때 함께 싸웠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인터뷰 한 날도 정옥자 씨의 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힘든 점이 많아도 김순옥 씨와 정옥자 씨에게 지금의 생활은 지난 투쟁의 연장선이다. 내 일처럼 함께 싸워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어서이다.

하루 쉴 틈이 없어요

김순옥 : 하루요? 바쁘죠. 하루 쉴 틈이 없어. 연대 집회 가야되고 법원 재판에 참석해야지. 장례 이후로 모든 게 끝나서 각자 가정으로 가서 장사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끝나고 보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더 많이 바빠 진짜. 계속 법원에 재판받으러 다니고. 나도 그렇고 다른 4구역 식구들이 날짜별로 다르게 재판받고 있고, 구속자들 면회 다니고, 철거민 연대집회도 나가고.

김순옥 님

▲ 김순옥 님



난 주로 재판내용이 공무집행방해했다는 거랑 뭐 폭행 이런 거 했다고. 하지도 안 했는데 걸고넘어지니까. 지난 5월 20일에 여경을 폭행했다나 어쨌다나 난 폭행한 사실이 없는데 그랬다고 하니까. 나머지는 업무방해. 그때 당시는 또 경찰이 너무너무 탄압을 했어요. 생각만 해도 아찔해요. 지금도 그 충격에서 못 벗어나요.

그동안 타 지역에서 연대를 많이 받았잖아요. 그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고 연대집회 다니는 거예요. 평생 이렇게 할 순 없지 내 생활이 있으니까 내 맘속으로 그동안 연대 받았던 마음이 좀 갚아질 정도 되면 그때 살 길 찾아야죠. 아닌 말로 지금 용산투쟁 다 끝났다고 우리가 연대 안 가면 그동안 우리 연대 해준 사람들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그 생각에 그런 마음으로 보답한다면, 보답이 아니지 내가 받았으니까, 갚기 위해서 연대하는 거지.

아직은 좀 더 보답을 해야 돼

정옥자 : 집회 나가서 시간이 늦어지고 하다보면 새벽 한시에도 들어가고, 딴 지역 동지들과 대화도 하다보면 시간이 지연될 때가 있어요. 그럼 열두시가 넘어요.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지역이 많아요. 근데 우리는 신생이잖아요. 선배지역 제쳐놓고 신생지역이 먼저 반쪽 승리라도 했잖아요. 동지들 보면 마음이 아파요. 여기도 빨리 좋은 결과 얻어서 각자 생활을 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들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있죠. 어려움은 있는데 아직까지는 선거도 남아있고 그동안 우리가 타 지역에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조금이나마, 큰 도움은 안 되지만 그래도 머릿수라도 채워줘야 되고 동지들한테 힘을 실어줘야 되잖아요. 아들이랑 며느리한테는 설득을 시켜요. 일단은 엄마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돌아가신 양반들이 있고 연대왔다가 죽은 사람이 있으니까 엄마는 좀 더 보답을 해야 한다고 하죠.

전세에서 사글세로

김순옥 :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도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안 되니까 힘이 들지요. 왜냐하면 내가 나가서 벌어야 생활을 하는데 그렇게 생활이 안 되니까 그게 힘들지. 저녁 야간 일을 했었어요. 어느 날 법원에 재판을 받고 버스를 타고 집엘 가다가 사람 구한다고 써놓은 걸 봤거든요. 낮에는 법원이나 집회 다니다보니까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저녁 6시부터 12시까지 일을 했었어요. 그런데 재판이나 집회가 늦게 끝나는 날이 있고 그래요. 한두 번도 아니고 주인한테 미안한 거예요 만날 늦으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구속자 재판 모든 게 끝날 때까지는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만뒀어요. 한 달도 못 했어.

정옥자 님

▲ 정옥자 님



명동에서 미사를 하는데도 가슴이 아픈 게 신부님들이 저희들한테 얼마나 많은 힘을 줬어요. 그랬는데 명동성당에서 미사 하는 걸 못 가가지고. 저녁에 하니까 낮에 하면 가겠는데. 그런 것도 굉장히 가슴 아프고. 오늘 우리 재판 끝나고 저녁에 미사 가는 거예요. 오늘은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몰라. 한번이라도 참석을 할 수 있다는 게 제일 기쁘고.

빨리 허물고 공사 들어가서 우리들도 함바집 잘 이뤄져야 하는데 잘 안 되니까. 싸울 당시는 뭐하나 부술까봐서 왜냐하면 장례도 안 치른 상태고 뭔가 잡혀야 집을 허물지 그 상태에서는 용납이 안 됐는데 지금은 함바집이 걸렸으니까 빨리 공사를 진행했으면 싶지. 이젠 또 우리 생존권이 거기에 달려 있잖아요. 잘 안 되니까 그것도 가슴 아프고.

용산에서 전세 살다가 지금은 사글세로 갔죠. 왜냐하면 집값이 그만큼 올랐어요. 용산에서는 처음 들어가서부터 오랫동안 살면서도 집세를 안 올려서 그 금액에 살았는데, 거기서 전세 빼서 다른 데 가려니까 그 돈으로 집 얻기엔 택도 없었어요. 너무나 집값이 올라버려서. 그리고 이 지역이 재개발이 되니까 다 그 주변으로 다 이사를 가잖아요. 방도 얻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 당시 정말 이 집 아니면 갈 데가 없어서 지하실이나마 얻어서 갔어요. 2층에 살다가 지하로. 집은 더 안 좋아졌죠.

한 치 앞도 못 보고 살았어

정옥자 : 용산에 산 지가 4구역에서만 27년이 됐어요. 김순옥 씨랑 가게가 붙었어요. 그래서 격주로 놀았죠. 항상 새벽 세 네 시까지 장사를 하다보면 가사 일은 내팽개치는 거잖아요. 한 달에 두 번 놀면 집에서 밀린 일 하다보면 쉬는 날이라도 대문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어요. 집에서 가게, 가게에서 집, 그 라인을 벗어난 지역은 뭐가 생긴 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한 치 앞도 못 보고.

이런 일 겪어보니까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허무하다는. 진짜 앞만 보고 살았기 때문에 옆도 안 돌아보고 살았기 때문에 지금은 딴 세상을 사는 것 같아요. 지금 인생을 다시 사는 기분이에요. 나다니면서 보고 듣고 하다보니까, 아 인생을 헛살았구나 싶어요. 그래서 우리 며느리보고 그래요. 애 갖기 전에 실컷 다녀라. 내가 못 해보고 살았으니까. 그래도 용산에서 포장마차하면서 한 달에 두 번씩이라도 놀았지 그 전에는 막 떠돌이 행상을 했기 때문에 노는 날이 없었어요. 아침에 나가서 장사하고 저녁에 들어와서 빨래하고.

그 기억의 충격에서 못 벗어나요

김순옥 : 아마 대표님들과 단식투쟁 들어갔을 때였을 거예요. 비가 와서 천막을 치려고 하고 있었어요. 완전무장한 특공대들이 싸여 있을 때 그때 생각하면 치가 막 떨려요. 난 그때 너무 충격 받았어요. 완전히, 뭐라고 그럴까 전쟁 일어나가지고 상대를 공격해야 되는 그런 분위기 였어 진짜. 완전히 우리 대한민국의 인간으로 안 보고 완전히 테러범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경찰들이 옷을 그렇게 입고 왔었어요. 난 그런 모습을 처음 봤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경찰들이 경찰복 입은 건 흔히 봤지만 철장 모자, 완장 찬 거 처음 봤어요. 그 충격에서 못 벗어나요 지금도.

장례 끝나고도 그래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삭지 않아서, 집에 가서 이제 정말 끝났다고 생각하는데도 저녁에 잠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요. 너무나 정말 이건 아닌데, 이래선 안 되는데, 정부가 탄압했던 거랑 모든 여건들이 치밀어 올라와서 지금도 거기서 깨어나지 못 해요. 이제는 이게 아니다 안정을 해야 한다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도 순간순간 그때 일이 잊히지 않아요. 그때 당시 정신과 치료도 받았잖아요. 저희들이 병원에 가서 치료했지요. 심리치료 같은 거.

감사하고 참 고마워요

정옥자 : 유족들이랑 자주 만나요. 주민총회를 한 달에 한 번씩 저희 집에서 하고 있어요. 마음이 아프죠. 전재숙 씨 같은 경우에는 영감님도 잃으셨고 아들이 구속된 상태고 항상 죄송한 마음은 있죠. 그런 마음은 가시질 않아요. 특히 전재숙 씨를 보면 마음이 아파요.

4구역에 있으면서 너무 많은 분들한테 평생 받지 못 할 은혜를 받았잖아요. 감사하고 참 고마워요. 딴 지역 철거민들한테 가보면 비참한 생활을 해요. 근데 우리 4구역은 호강 아닌 호강으로 투쟁을 했지요. 그동안 고생들 많이 하셨죠. 이로 인해서 좋은 경험도 했고 그동안 도와준 분들 감사드려요.

김순옥 : 나 하나만 있는 걸로 생각했는데 정말 철거민이 너무 많았고, 용산 참사를 아프게 생각해서 연대해준 고마움 그리고 또 사제단 신부님들 그 분들 참 정말 많이 고생하셨죠. 지금도 그 기억들은 안 잊혀요. 신부님들과 같이 지낸 생활들 한시도 잊어본 적 없어요. 제가 밥을 주로 했잖아요. 신부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우리들이 식사 대접할 때 그 마음 있잖아요. 신부님들과 연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마음의 준비 해가지고 정성을 보여서 신부님들께 맛있게 해드려야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그런 게 즐거웠어요. 같이 밥 먹고 똑같은 밥상에 앉아서 차별 없이 같이 식사했던 거 그게 기억에 남아요.

유가족인 전재숙 씨도, 4구역의 김순옥 씨와 정옥자 씨도, 그들이 여전히 마음 졸이며 지내는 가장 큰 이유는 내 가족, 동료가 구속돼 있어서이다. 구속된 철거민들의 선고 공판이 인터뷰를 한 며칠 뒤인 지난 31일에 있었다. 유가족들과 4구역 철거민들은 정말 설마설마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죄 등으로 4년에서 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1심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결과였다. 선고 공판이 있고 다시 김순옥 씨와 통화했을 때, 구치소에서 막 면회를 들어가려던 참이라고 했다.

“분통하고 어찌 할 수 있는 길이 없네요. 정말 계란으로 바위치기네요. 정말 너무해요. 우리 얘기 좀 들어보라고 올라간 건데. 정말로 이번에 나올 줄 알았어요. 너무나 가슴이 아파요. 어린 애기 아빠랑 환자도 있는데, 어떡하면 좋아요. 정말 철거민들은 설 데가 없어요.”

용산 참사의 모든 책임은 철거민에게만 돌려지고 있다. 이 상황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정말 ‘어찌 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김순옥 씨의 말이, 대한민국 법과 공권력 안에서의 현실이다.


덧붙임

윤미 님은 <인권오름> 자원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