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되짚어본 1년의 싸움들 켜켜이 많은 인권활동가들이 있었어. 범대위에도, 미사에도, 추모대회와 그 외 다양한 기획들에 보이기도, 보이지 않기도 하는 인권활동가들이 있었지. 굳이 인권활동가들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 없이, 소중하고 다채로운 인권활동들이 있었어. 그런데 ‘인권운동’은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은 왜일까. 각각 다른 자리에서 다른 모습으로 인권운동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2006년의 평택 대추리나 2008년의 촛불/광장에서 인권운동이 보였던 것과는 달랐거든. 어쩌면 2009년의 용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권운동’이 한가운데서 온몸으로 싸워야 하는 자리였던 것 같은데 말이야.
인권운동은 인권을 짓밟는 구조에 맞서 싸우는 운동일 거야. 거대한 구조만 쳐다보다가 정작 그 구조를 더욱 견고하게 키우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을 놓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그 일상의 쳇바퀴를 멈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겠지. ‘변혁’이란 어느 한 순간 폭발하는 것이기보다는 수많은 균열과 탈주의 합창과 같은 것이라면, 용산참사는 인권운동이 풍덩 뛰어들어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싶어. 그런데 지금의 인권운동은 자신의 운동 너머를 볼 수 있는 시야와 역량이 조금 부족한 것 아니었을까. 그리고 너무 전문화되어버린, 인권운동의 전문화보다 영역별 주제별 전문화에 갇히는 경향도 영향을 미친 듯해.
물론 모든 일에 손을 놓고 달려들었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이명박 정권이 쏟아 붓는 공격들을 힘닿는 만큼 막아내는 것도 중요하고(그러면서 많이 지치기도 하지만) 쉽게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인권운동이 보고 행동해야만 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는 것도 중요해. 다만, 분명히 적지 않은 활동들이 있었는데 그걸 인권운동의 흐름으로 만들어가지 못한 게 아쉬운 거야. 이 싸움 안에서 배울 것도 많았고 인권운동의 또 다른 전망을 찾아가는 길의 한 이정표였을 듯한데. 그동안 인권운동이 놓치지 않았던 낮고 섬세한 시선의 힘을 이 싸움 안에서 펼치며 더욱 풍요로운 싸움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이건 인권운동의 의제 설정 능력이 약화된 것과도 맞물려 있는 것 같아. ‘인권’이 좋은 거라는 정도의 사회적 인식은 그동안 운동의 성과인 동시에 운동의 한계이기도 해. 그 자리에서 인권운동이 던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인권운동 안에서도 막연한 채 고민들만 이어지는 듯하고 다양한 운동들과 자신 있게 만나지 못하는 조건이 되는 것 같기도 해. 그 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닐 거야. 국가폭력이 전형적인 ‘인권’ 문제라는 점에 기대어, 개발과 주거권 등에 대한 문제의식으로까지 나아간 것은 분명 성과야. 그리고 인권운동이 용산참사를 놓지 않고 계속 고민하며 긴장을 잃지 않았던 점은, 다시 인권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거름이 될 거야.
‘용산참사’가 한국사회에 남긴 것
‘용산참사’는 한국사회가 넘어서야 할 지점, 어쩌면 ‘인권’이 부딪쳐야 할 자리를 보여준 사건인 듯해. 그래서 지금 ‘인권’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준비해야 하겠지. ‘용산참사’와 1년의 싸움은 한국사회에 무엇을 남겼는지 차분히 살펴야 할 때야.
이 싸움으로 분명 우리는 하나의 전환점에 섰어. 60년대 광주대단지 항쟁 이후 철거 싸움은 끊이지 않고 있어왔어. 하지만 90년대 말 이후로 철거싸움은 사회적 이슈가 되기 어려웠고 그건 운동진영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어. 뉴타운 원주민 재정착률이 20%에도 미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로 개발의 문제점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철거싸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 ‘용산참사’는 달랐어. 적어도 작년 한 해 동안 “보상 더 받으려고 떼쓴다”거나 “테러집단”이라는 편견과 낙인은 기를 펴지 못했어. 그 덕분에 용산참사가 끝까지 정부의 부담으로 남아 장례식까지 치룰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개발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적어도 이제 사람들은 철거민들이 뭐라고 호소할 때, 무슨 사연이 있겠구나 하며 귀를 한 번 더 기울일 수 있는 수준이 된 거야.
하지만 또 거기까지인 듯. 개발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것에 비해 구체적 성과는 뚜렷하지 않아. 개발사업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고 개발 제도의 기본 틀도 거의 그대로야. 용산참사 이후 상가세입자 휴업보상이 3개월에서 4개월로 상향 조정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세입자의 삶에 기여하는 정도는 미미해. 반면, 얼렁뚱땅 개악된 내용 중에는 세입자 보상을 조합원 개개인의 부담으로 돌려, 집주인들이 알아서 일찌감치 세입자들을 내쫓게 만드는 내용도 있어. 개발로 인한 세입자의 강제퇴거를 집주인과 세입자의, 그야말로 사적인(한국의 임대차보호법은 이럴 때 정말이지 쓸모없으니까)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거지. 추상적 수준에서 개발주의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저항 담론을 벼리고 그걸 정책으로 구체화하는 게 부족했기 때문인 듯해.
경찰폭력에 대해서도 형사적 책임을 묻는 데까지 가지 못했어. 앞으로 재발방지대책을 확실히 마련하거나 경찰력에 대한 민중 통제의 실마리를 마련하지도 못했고. 2005년 전용철/홍덕표 농민 사망사건 당시 운동은 대통령이 경찰 책임을 인정하고 경찰 총수를 퇴진하게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어. 하지만 경찰 폭력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나 사회적 힘을 만들어내는 데까지로 나아가지는 못했지. 그러는 동안 경찰은 오히려 평화시위를 위한 민관공동위원회를 구성해 집회시위를 위한 통제 조치들을 정비하는 등 곧바로 역공에 나섰지. 이번에는 경찰 책임이 오히려 더 희석됐어. 집회 시위 진압을 위한 물리력 강화도 계속 추진되고 있고. 경찰특공대 투입에 따른 논란은 농성진압 전문부대를 창설하는 방법으로 손쉽게 비껴가고.
물론 이 모든 것을 1년의 싸움으로 얻는 건 쉽지 않아. 다만, 장례를 치루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 지금 우리가 서있는 지점을 명확히 보는 것은 중요할 거야.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권을 상대로 1년의 싸움을 버텼고, 최소한 명예 회복과 함께 장례를 치룰 수 있었다는 것, 용산4구역에서 제한적이나마 세입자대책을 보장받은 만큼의 승리가 있지만 그건 절반의 승리라는 걸 새겨야 할 듯해. 그 절반은 단지 정부나 서울시의 사죄나 진상규명이 부족하다는 의미에서 절반이 아니라, 개발과 국가폭력에 대한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며 ‘전환’을 완성하지 못한 점에서 절반인 거야. 하지만 우리가 그 전환점에 서있다는 점에서 또한 절반의 승리인 거고.
지금 준비해야 할 싸움은 무엇일까
다시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비슷한 양상이 아니더라도, 아무도 확신할 수 없어. 곧바로 치고 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아야 할 거야. 저항 그 자체와 경찰폭력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사건’으로 접근하는 우리의 프레임도 필요할 듯해. ‘저항은 정당했는데 경찰력은 과도했다’가 아니라 ‘저항권을 박탈하려는 국가의 구조적 공세’와 같은 통합적 접근이 필요해.
개발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자리에서 어떤 프레임을 제시하며 대중적인 기획을 만들어갈 것인지도 고민해야지. ‘개발 대 반개발’보다 ‘강제퇴거 대 인권’이라는 구도를 내밀며 싸워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개발이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피상적 인식에서 개발 자체에 대한 성찰까지 넘어가는 것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아. 개발사업의 종류가 엄청나게 많은데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어렵고 ‘개발’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할 만큼 대안적 고민이 풍부하지도 않고. 전략적으로, ‘강제퇴거 반대’를 운동의 근거지로 삼고 물러설 수 없는 기준선을 다져야 해. 어떤 개발이든 그 지역에 살던 주민들의 삶 또는 인권을 후퇴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기준을 ‘강제퇴거’라는 말로 꿰어 싸움을 만들어가야 해. 강제퇴거금지입법도 그런 운동의 맥락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어. 이런 고민이 쌓이면 개발사업뿐만 아니라 도시공간(그리고 그것의 재구성)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밝혀나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런 흐름은, 과거의 철거민 운동의 폭을 넘어 다양한 사회운동과, 용산참사를 계기로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된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흐름이어야 하겠지. 지금까지 철거투쟁은 해당 지역 밖에서 할 수 있는 활동에 한계가 있었고, 다소 폐쇄적인 문제도 없지 않았어. 그렇다보니 투쟁 전술이 다양해지지 못하기도 했고. 여전히 개발사업구역에서의 구체적인 철거투쟁은 중요해.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싸우는 것. 하지만 그 싸움들을 전체의 싸움으로 엮어내면서 다양한 운동과 개인들이 힘을 모을 수 있는 자리도 만들어야 해. 지자체 선거도 그런 계기 중 하나로 고민해야 하겠지.
경찰특공대라는 대테러부대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저항에 투입되지 않도록 할 장치도 마련해야 해. 여전히 정부와 경찰은 생존권적 저항에 ‘테러’라는 딱지 붙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어. 꼼수를 부리면서 집회시위를 막는 정책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운동은 더욱 치고나가야 할 듯해. 집시법 개정도 과제겠지. 우리의 시각과 내용을 벼리면서 캠페인 등을 통해 입장을 알리고 정부를 압박하는 작업들도 필요하고 용산참사의 책임자들을 계속 주시하는 모니터링도 필요해. 비록 작년 한 해 동안 형사적 책임을 묻지는 못했지만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의 과제는 여전히 남은 거니까.
철거민들에 대한 재판과 남경남, 박래군, 이종회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것도 기억해야지. 재판 대응과 구속된 사람들에 대한 지원과 연대를 모아가는 것도 중요하고, 무엇보다도 이 과정 자체가 역사의 기록이 될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지. 매년 1월마다 같은 날 제사를 올리게 될 사람들과 용산에 번쩍이는 고층 건물이 들어선 후에도 2009년 이전의 용산을 잊지 못할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말자.
이제, ‘내일’의 싸움을 시작하자
“이렇게 싸움이 길어질 줄 몰랐어.” 많이 들었고 많이 했던 말이야. 이 평가들이 서있는 자리는 고작 거기인지도 모르지. 지나고 보니 할 수 있는 말들. 정말 아무도 얼마나 싸워야 할지 몰랐고 끝없이 단 하루를 연장하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거든. 하지만 문득, 싸움이 얼마나 갈지 알고 시작하는 싸움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도 왜 이런 말을 자주 하게 됐던 걸까. 그건 어쩌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몰랐던 우리들의 모습이었던 것 아닐까. 결국 ‘길어진’ 싸움은 ‘장례’라는 목표 말고 다른 싸움을 만들어내기 어려웠던 조건의 반영이기도 하다는 거지. 사건에서 드러난 개발의 문제나 국가폭력의 문제를 놓고, 어쩌면 ‘목표’는 보였던 건데, 어떻게 싸움을 벌여야 할지 막막했던 조건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압도했던 ‘불타는 망루’와 ‘죽음’의 트라우마도 잘 살펴야 할 거야. 초기에 대중적으로 각인된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쉽게 스러지지 않는 싸움일 수도 있었지만 이 인상은 활동의 기조나 분위기를 규정할 수밖에 없기도 했고 우리를 힘들게 하기도 했어. 온갖 추모대회와 문화제가 막히면서 죽음에 대한 예우도 없는 정부에 대한 좌절감과 회의가 더욱 무겁게 우리를 짓누르기도 했고. 아마 1년 동안 그걸 봐야 했던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이 트라우마가 남아있을 거야. 그걸 지워버리거나 덮어버리지 않고 조금씩 돌아보면서 잘 다독여야 해. 분노와 슬픔과 사람들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향했던 그 곳을 지워버릴 수는 없잖아. 그리고 그 곳에는 다시 우리의 싸움을 일으켜 세울 씨앗이 곱게 잠들어있으니까.
1월 20일, 우리는 초를 들고, 국화를 들고 용산으로 모였어. 그리고 먹먹한 하늘에서 눈물처럼 눈이 쏟아지던 날, 장례식을 치렀어. 긴 하루의 싸움이 끝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들었던 국화를 가슴에 묻으며,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덧붙임
미류․유성․민선․은아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