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사랑했다
라는 말, 전혀 어색하지 않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중국어로는 이 문장을 표현할 수 없어요.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어로 “워아이니(我愛你)”입니다. 그런데 “나는 너를 사랑했다”라는 말은 “워아이니러(我愛你了)”라고 말할 수 없거든요. 참고로 중국어에서 ‘러(了)’라는 말은 한국어의 과거시제 ‘-었-’의 의미를 가진다고 흔히 알려져 있어요. 한국어로는 과거의 사실로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중국어로는 “아이러(愛了)”라고 말할 수 없다니. 신기하죠? 왜 안될까요? 중국어에서는 달리다, 먹다 등과 같은 동작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 다른 말에는 ‘러(了)’를 붙여서 과거의 의미를 나타낼 수가 없어요.(좀더 자세히 말하면 복잡해지긴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했다”라는 말은 ‘과거에 나는 너를 사랑했다’는 뜻과 더불어 ‘하지만 지금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뜻도 함께 가질 수 있죠. 그렇다면 이런 의미를 전달하고 싶을 때,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중국인들은 어떻게 중국어로 이런 뜻을 전달할까요?
대신 중국어로는 “그때 나는 너를 사랑했어”라는 말은 “땅스워아이니(当时我爱你)”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러니 중국어로도 ‘과거에 나는 너를 사랑했지만 지금은 사랑하지 않아(혹은,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고)’라는 뜻을 표현할 수는 있는 거죠. 다만 ‘그때’와 같은 시간부사를 꼭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부사를 넣으면 ‘과거시제’를 나타내는 다른 말은 따로 넣지 않아도 됩니다. 한국어에서는 “어제 밥을 먹었어”라고 ‘어제’와 ‘먹었어’와 같이 시간부사와 함께 과거형을 모두 표현해야 하는데, 중국어에서는 “어제 밥을 먹어”와 같이 ‘어제’만 들어가면 ‘먹어’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죠. 이때 오히려 중국어로 ‘먹었어(츠러(吃了))’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려요. 그래서 중국어로는 “나는 몰랐어”, “너 참 귀여웠어”와 같은 말을 할 수 없어요. ‘그때’, ‘어렸을 때’ 등과 같은 과거 시간을 나타내는 말을 꼭 함께 해줘야 하는 것이죠.
또 하나 신기한 것은, “길을 걷고 있었지”와 같은 ‘과거진행형’도 중국어로는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길을 걸었다”나 “길을 걷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이런 표현도 중국어로는 “그때 길을 걷고 있어(땅스워짜이쪼우루(当时我在走路))”와 같이 표현할 수 있어요. ‘그때’가 이미 과거의 사건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걷고 있어’라고 해도 저절로 한국어의 ‘걷고 있었어’처럼 과거의 일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죠. 모든 언어는 표현의 방법이 다를 뿐이지 대부분의 것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혹은, 한 언어 내에서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듯이, 모든 언어들은 정확하게 서로 번역될 수 없는 것들을 모두 갖고 있죠. 더 우월하다거나 열등한 언어는 없습니다. 모든 언어는 모두 그 자체로 완결적인 체계를 갖고 있는 독자적이고 평등한 관계에 있어요.(라고 언어학에서는 보더라고요. 그러니까 영어가 한국어보다 우월하지 않고 필리핀영어가 미국영어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말이죠. 멋있죠?^^)
어떤 말은 한국어로 할 수 있는데 중국어로는 할 수 없고, 또 어떤 말은 중국어로는 할 수 있는데 한국어로는 할 수 없고.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어와 중국어의 시간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더라고요. 한국어는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시제-예를 들어, 앉았다, 앉는다, 앉을 것이다-가 발달되어 있는 언어이고, 중국어는 완료, 진행과 같은 상(相)-이게 좀 어렵죠?^^;; 예를 들어 ‘앉았다’라고 하면 앉은 이후에 앉아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완료상이 되고, ‘앉고 있다’고 하면 앉는 동작의 진행을 나타내는 진행상이 되는 거예요-이 발달되어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둘 다 시간과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 시제는 모든 문장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의 순간순간마다 모두 시제가 표현되지만(그래서 끊임없이 시제/시간적 관계를 신경쓰지만), 상은 사건의 전개가 더 중요해서 ‘어제’, ‘내일’ 이런 식으로 어떤 한 시간적 지점이 표시되면 더 이상 시간 표시를 하지 않아도 돼요. 사건의 진행에 따라 상식적으로 시간의 흐름이 저절로 표현되는 것이죠. 그래서 한국어로는 ‘나는 어제 아침에 일어났다. 밥을 먹었다. 운동을 했다. 기분이 좋았다’와 같이 말해야 하지만, 중국어로는 ‘나는 어제 아침에 일어난다. 밥을 먹는다. 운동을 한다. 기분이 좋다’와 같이 말하게 됩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한국인이 중국어를 말할 때, 반대로 중국인이 한국어를 말할 때 이런 부분에서 많이 틀리더라고요.
한국어와 중국어의 이런 차이점은 한국인과 중국인이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한국인들은 어떤 사건을 생각할 때 그 사건의 상황 하나하나는 현재 나와의 시간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는데, 반면 중국인들은 어떤 사건의 전개를 통해서 그 사건의 흐름을 주로 생각한다는 것이죠. 사건과 관련된 시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다는 말인데요.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어요. 외국의 학자가 실험한 건데, 한국어와 같이 시제를 사용하는 말을 하는 사람(편의상 한국인)과 중국어와 같이 시제를 사용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편의상 중국인)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어요. 두 장씩 두 쌍의 그림이 있는데, 한 쌍의 그림은 한 여성이 공을 차기 전과 후의 모습이고 다른 한 쌍의 그림은 같은 여성이 공을 차는 모습과 쓰레기를 차는 모습이에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두 쌍의 그림의 차이를 설명하는 내용에는 차이가 없었지만, 공을 차기 전과 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중국인이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해요.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언어도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고.
말하자면, 언어는 사고방식을 반영하기도 하고 또 언어가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이런 말의 차이가 결국 사고방식의 차이와 연결된다는 것이죠. 말이 전적으로 생각을 지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말과 생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는 할 수 있으니까요. 말을 통해서 논리의 틀을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코끼리는 생각 하지마>와 같은 책에도 많이 나와 있더라고요.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말을 통해서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볼 수 있는 사례는 진짜 많죠. 4대강 죽이기/4대강 살리기, 사상·표현의 자유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주적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을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가보안법 등.
뭐, 대충 이런 내용이 지난 학기에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한 과목에서 제출한 보고서 내용이에요.(위에 마지막 내용만 빼고요) 나름 흥미롭게 공부를 했지요.ㅎㅎ 그래서 이번 방학 기간에는 독일 나치시대에 나치들이 어떠한 언어로 대중들을 선동했는지 좀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나치에게 저항한 독일인들도 있지만 많은 독일인들은 나치들에게 동조했으니까요. 비슷한 생각이 요즘에도 들게 되더라고요.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합의와 절차조차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반민주적인 현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왜 떨어지지 않는 걸까? 물론 ‘언어’로만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언어를 통해 대중들을 어떻게 선동하는지 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자자, 방학을 해도 사랑방 활동을 쉬는 게 아니라서 방학을 했는지 전혀 실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여름방학 파이팅!^^/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