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이래 줄곧 빈민운동에 헌신해 온 김흥겸(36, 전 전국빈민연합 연대사업국 차장)씨가 지난해부터 암과 투병을 하고 있다. 현재 그는 위에서 시작된 암세포가 간과 뇌에까지 퍼져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상태다.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가 그의 쾌유를 빌며 글을 보내왔다.<편집자주>
행정구역은 ‘특별시’이나 몇 마지기는 됨직한 논바닥과 한적한 신작로가 나 있는 그의 집앞 풍경은 여유롭고 따뜻하다. 구로구 항동 그린빌라 1-5호. 도시빈민운동의 살아있는 역사를 한몸에 껴안고 있는 그는 지금, 그 눈물겨운 빈민운동의 과업을 잠시 내려놓은 채 말기의 위암투병을 떠안고 있다.
김흥겸. ‘아직은 펄펄 날아다녀도 시원치 않을 나이에 이게 무슨 궁상이냐’고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보면서 문병 온 철거민 몇몇 아주머니들은 이내 무겁고 근심스런 표정을 거두고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한참 후 그의 투병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문병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럼없이 웃다가 혹은 간간이 탄식을 하다가는 돌아갔다.
혼자일 때 그는 다시 풍욕을 시작한다. 일출 전 3-5회, 일몰 후 3-5회를 30분 간격으로 한다. 죽염과 치커리 엑기스 등으로 음식물을 대신하다가 풍욕의 효험 탓인지- 이제는 예전같지는 않지만- 먹는 것과 잠자는 일이 매우 가쁜해지고 있노라며 근황을 전한다. 그의 근황 가운데, 그는 결코 말하지는 않지만 기도를 하는 일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일생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느님과의 진지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억세게 돈 안되는 삶
그는 81년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짐을 싸들고 낙골로 거처를 옮긴다. 생애 첫 공식적인 가출. 서울의 수많은 달동네 가운데 하나인 낙골에 오른 그는 단지 그곳에서 진짜 하느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이 가출의 중요한 이유였다. 대학 3학년 때는 민중가요 ‘혀잘린 하나님’을 작곡하기도 했고, ‘젊은 예수’라는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그런 그는 낙골의 ‘사람사는 것 같은’ 살가운 인정에 발목잡히면서(그가 즐겨쓰는 표현이다) 본격적인 도시빈민운동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억세게 ‘돈 안되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
암울한 군부통치 시절. 무자비한 군홧발에 짓눌려 신음하는 도시빈민 형제들의 생존권 탄압 현장에서 그는,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몸을 내던졌다. 먹고 자는 일 대신 철거현장에서의 싸움 속에서 하루를 정리해야 마음이 편하던 그였다.
도시빈민과 숨가쁘게 살아온 80년대
군부독재와 독점재벌, 그들의 이해관계가 맞으면 맞을 수록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도시빈민의 삶은 더욱 황폐해지고 구조적으로 열악해지던 80년대는 이땅의 젊은이들의 피를 뜨겁게 솟구치게 하였으며 그는 그 중심에서 한번도 비켜나지 않았다. 정부의 무원칙한 주택정책에 맞서 주민들의 조직적인 투쟁으로 빈민운동의 분기점을 이룬 목동싸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던 상계동과 양평동의 철거싸움, 철거민들의 자주적인 투쟁의 최초의 성과물인 돈암동 영구임대주택 쟁취싸움, 노점상 형제들의 목숨을 건 생존권 수호투쟁, 일용노동자들의 대중 조직화투쟁 등등. 그는 싸움의 현장에서 성실한 조직사업으로 적지 않은 도시빈민 대중지도자들의 정치적 사상적 철학적 견해를 좁히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해 왔고 어려운 시기일수록 ‘매맞는’ 선도투쟁을 즐기면서 완수해온 조금은 특이한 체질이다.
새로운 각오로 시작을
투병 중에도 그는 적지 않은 고민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80년대의 배고픈 싸움이 다소 나아진 것처럼 보이나 여전히 숱한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도시빈민 형제들의 생존현장. 설마 하며 일말의 기대를 갖게 하던 문민정부의 도시빈민정책은 실로 정책이랄 것도 없는, 가난을 더욱 구조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젠 새롭게 무장하고 더욱 강한 모습으로 도시빈민 형제들과 함께 하려던 순간이었다. 좀더 새로운 각오를 품고 비장하게 기도를 드리려던 참이었다.
딸 보미를 보면…
밖에서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는지 조금은 부산스러운 가운데 그가 불현듯, “이제 다섯살 난 딸 보미를 보면 ‘무조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짧지 않은 시간을 누웠다 앉았다하며 나누던 대화 속에 피로가 끼어들어온 것 같다. 그의 집을 나서며 보미를 보면 무조건 살고 싶다는 그의 바램과 같이, 그의 투병을 지켜보는 4백만 도시빈민 형제들도 그가 ‘무조건 일어나’ 해맑은 모습으로 하루속히 그들 곁으로 돌아와줄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의: 780-4392(박혜경)
박정석(전 전국빈민연합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