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주년 세계노동절
분노 서린 군중들의 함성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경제파탄의 책임을 온전히 떠맡은 채 실업대란에 휘말리고 있는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철회'와 '재벌재산 환수' 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예비실업자의 처지로 내몰린 대학생들과 생존권의 위협을 겪고 있는 시민들 또한 이 대열에 합류했다.
1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제108주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는 노동자·민중들이 재벌과 부패관료 등 기득권 세력에게 최후의 경고장을 보내는 자리였다.
종묘공원 기념집회
이날 오후 종묘공원엔 수만의 인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주최측 추산 3만5천명, 보도진 추산 2만명. 20대 청년노동자에서부터 깊게 팬 주름의 중년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참석자들의 표정엔 비장함이 감돌았다. 이갑용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의 전 간부진과 각계 사회인사들이 대거 자리한 연단의 분위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래패 '꽃다지'의 공연에 맞춰 즐겁게 노래를 따라부르며 힘차게 팔뚝을 치켜들던 한 아주머니는 눈가에 눈물을 보였고, "더 이상 우리를 도둑놈으로, 사기꾼으로, 부랑자로 만들지 말라"는 사회자의 외침은 절절했다.
군중들의 환호 속에 연단에 선 이갑용 민주노총 위원장은 김대중 정부를 향해 노동자들의 '한판 투쟁'을 선언했다. 이 위원장은 "지금까지 김대중 정권은 명백히 자본가와 기득권세력을 위한 정책만을 시행해왔다"며 "고통받는 노동자·민중을 위해 민주노총이 앞장서 투쟁할 것을 당당히 선포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 위원장은 △재벌체제의 해체와 총수재산의 환수 △노동탄압 기업주에 대한 구속처벌 △불로소득계층에 대한 고용세 부과 및 사회보장제도 개선 △IMF 재협상 △택시완전월급제를 비롯한 대선공약의 즉각 이행 및 공공부문 감원 중단 등을 강력히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5월말-6월초에 걸쳐 총파업을 비롯한 총력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위원장은 또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지도부를 채찍질해 달라"고 호소하면서 전세계 노동자들의 지지를 요청했다.
치열한 가두시위
한편, 집회가 끝날 무렵이던 오후 3시 30분경, 집회장소인 종묘공원으로 난데없이 경찰의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당초 명동성당까지 평화행진을 벌이기로 되어 있던 참석자들은 평화적 집회에 최루탄을 난사한 경찰에 분노했고, 하나둘씩 짱돌을 집어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시위대와 전투경찰 간의 공방전은 종로3가와 종로4가를 오가며 세시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됐다.
같은 시각 을지로4가 일대는 대학생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3백여미터의 거리를 두고 전투경찰과 대치한 대학생들은 노래와 구호를 섞어가며 거리를 '해방구'로 삼았고, 이어 퇴계로를 거쳐 충무로로 이동했다.
저녁 6시경 종로에 있던 시위대가 충무로로 합류하면서 다시 시위대와 전투경찰 간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양측은 몸과 몸을 부딪히며 대치했고, 시위대는 명동성당까지의 행진을 계속 요구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시민들 사이에서도 "길을 터주라"는 요구가 터져 나왔지만, 결국 저녁 6시 30분경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탄을 난사하며 대열을 밀어냈다.
명동성당 정리집회
명동성당으로 들어간 민주노총 지도부와 일부 대열은 긴급기자회견과 정리집회를 갖고 경찰의 폭력해산을 강력히 규탄했다. 민주노총은 성명서를 통해 "명동까지의 행진은 사전 집회신고에 의한 적법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야만적인 폭력으로 행진을 가로막았다"며 "이는 소위 국민의 정부라는 김대중 정권이 자신의 본질을 너무 쉽게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또 "이승환(한국후꼬꾸 노동자), 임세진(전국연합 간부), 정택균(인덕전문대 학생) 씨등 시위대 다수가 경찰의 폭력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