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2일 대통령 훈령에 의해 법적 지위를 가진 공안대책협의회(이하 공대협)가 탄생했다.
대검찰청,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검 공안부의 건의를 대통령이 받아들인 것이다. 대검 공안부장이 의장을 맡고 국가정보원, 경찰, 기무사 등의 정보기관과 통일부, 노동부, 교육부 등 13개 행정부처의 국장급 15인이 참가하는 김대중 판 '관계기관대책회의'가 불법의 굴레를 벗어던진 것이다.
이 막강한 기구는 중앙만이 아니라 지방 검찰청마다 설치되었다.
노태우 정권 때의 공안합동수사본부가 다시 등장한 것은 96년 한총련 학생들의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한총련 좌익사범합동수사본부'가 발족하면서부터였다.
이 기구는 그 다음해 5월에는 '공안사범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로 개칭되었다. 공대협의 전신인 이들 조직을 검찰 공안부가 안기부(현 국가정보원)를 제치고 주도하였고, 그때로부터 오늘의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
공대협의 전신이었던 초기 합수부에서는 오히려 한총련에 대한 대책이 강조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한총련의 와해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합수부는 그 목적답게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대의원들에 대한 탈퇴를 강요하였다.
96년부터 이어진 한총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은 결과적으로 학생운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신공안'마저 거부한 공안검찰
김대중 정부의 출범 이후 박상천 전 법무부장관은 '신공안 정책'을 주창했다.
그의 신공안에 대한 발언은 '질서와 인권의 조화'로 집약될 수 있다. 정치적 중립성을 천명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면서 인권보장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국가보안법의 남용 금지의 원칙이 제시되고, 전향제도 대신 준법서약제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1년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만 413명에 이르렀다. 그중 92.3%인 381명이 국가보안법에서 가장 반인권적인 독소조항이라는 7조(고무․찬양등) 위반이었다. 그리고 90% 이상이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결과적으로 공안검찰이 주도하는 합수부에서는 신공안은 적용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관련 조폐창 파업 유도 공작을 취중에 발언한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그는 합수부와 공대협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다)은 올해 <월간 말> 4월호 인터뷰에서 "나는 신공안이란 단어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진공안이지 신공안이 아니다"고까지 극언을 했다.
노숙자도 불순세력
합수부는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을 계속 표명해왔지만, 합수부의 관심사는 공안사건에 제한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22일에는 대검 공안부장(당시 진형구 부장)이 주도하여 보건복지부, 서울시 등 유관기관이 참석한 가운데 합수부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실직노숙자들이 사회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며 단속을 강화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실직 상태에서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에게까지 공안적인 잣대를 들이민 것이었다.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또, 98년 12월 11일 열린 회의에서는 구조조정에 반발하여 파업을 벌이는 행위만이 아니라 기업주들도 엄벌에 처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노동자에 대해서는 합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대대적인 구속과 수배로 철퇴를 가했던 반면 지금까지도 구조조정에 협조하지 않는 재벌을 처벌한 예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최근의 부산구치소 '영남위원회' 강제이감 사건도 공대협이 깊숙히 개입한 작품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일고 있다.
구치소측은 자신들이 아닌 윗선에서 결정난 문제라는 인상을 풍겼으며, 구치소장도 자신의 진급에 필경 악영향을 미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당당했다는 증언들이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이처럼 공대협은 그 전신이었던 합수부 시절부터 정권 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사안에 대해 철저하게 공안적인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현저히 후퇴시켜 왔다.
이에 대해 사회진보연대 정종권(32) 사무국장은 "결코 공권력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 "체제 수호를 위해 노동자와 민중들의 투쟁에 대해 공안검찰이 강경 탄압을 주도한 것"이 공대협의 본질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인권하루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