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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시 민주주의

돌아온 백골단과 골목길의 기억


90년대 초반, 선배들은 유인물을 집집마다 나눠 넣는 법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골목에 들어설 때는 절대 골목 첫 집부터가 아니라 끝 집부터 유인물을 넣어야 한다. 혹시라도 수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있어 도망치게 되면 골목을 등지고 있어야 하거든.”

그때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유인물은 고작 ‘민중생존권 탄압하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라거나 ‘민주정부 수립하자’라거나 하는 그저 그런 주의주장을 담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당당히 밝힐 수 없는 시간을 살고 있었다. 표현의 자유나 시민·정치적 권리는 숨겨야할 것이었고, 탄압받기 딱 좋은 구실에 불과했다. 양복을 입은 군인이 통치하는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앞선 시대, 파리로 망명한 홍세화가 유인물 배포로 인해 귀국할 수 없음을 설명하자 프랑스 정부 관계자가 의아해했다고 하지만 그 때는 그랬다. 군복을 벗지 않은 독재가 고문을 일삼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돌아온 백골단

그러나 2008년. 십 수 년의 세월을 돌아 왔지만, 다시 골목길을 등지고 유인물을 돌리는 법을, 감시와 수배, 체포와 구금을 피해 뛰는 법을 연습해야하는 것은 아닌지 등골이 오싹하다. 지난 15일 행정안전부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 중에는 오는 9월부터 전경 대신 경찰관으로 구성된 체포전담 부대를 신설해 배치하고, 시위현장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가압류), 즉결심판(구류) 등 예외 없는 사법 처리를 가하겠다는 방침이 있었다.

체포전담 부대… 빠른 속도로 ‘백골단’이라 불리던 이들의 잔상이 기억의 한 곳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얀 운동화, 청바지, 방탄 헬멧과 가죽장갑, 곤봉을 들고 있던 그들. 매캐한 최루탄이 터지면 예외 없이 그들의 빠른 발자국 소리와 터져 나오던 욕설, 머리채를 잡혀서 질질 끌려가던 사람들, 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어깨 죽지와 온 몸을 두들겨 대던, 참혹한 폭력의 기억. 강경대의 죽음과 김귀정의 영정 사이로 목이 터져라 외쳤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지금은 2008년이야, 아닐 거야“ 라고 고개를 흔들어 보지만 나아진 것은 없다.

91년 백골단의 강제 진압과 폭행으로 강경대 열사가 사망한 이후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적인 투쟁이 불타올랐다. (출처 :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

▲ 91년 백골단의 강제 진압과 폭행으로 강경대 열사가 사망한 이후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적인 투쟁이 불타올랐다. (출처 :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


또한 정부는 “공무집행을 방해한 경우에는 경미한 사안에 대해서도 관용치 않고 사법 처리하겠다”, “불법시위단체에 대한 정부보조금 지원제한 확대한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다른 피사체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한가운데 홀로 멈춰 선 전봇대처럼,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은 세월이 흘러도 홀로 멈춰 서 흐릿한 한 장의 사진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실용주의와 개발, 여전히 ‘잘살아보세’만을 떠드는 새마을 운동의 한 가운데서 ‘인권’과 ‘민주주의’는 마치 전봇대와 같다는 생각. 이명박 정부 출범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폭력의 칼날은 벌써 피를 묻히고 서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1일 새벽 6시 30분,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장은 7개 중대 7백 여 명의 경찰과 150여명의 용역직원에 의해 강제 철거당했다. 증권선물거래소 앞 농성장 일대를 포위한 경찰은 온 몸에 쇠사슬을 감고 저항하는 노동자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물리적 폭력을 휘둘렀고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 간부 6명은 얼굴과 머리 등에 큰 부상을 입고 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다. 이것도 이명박 정부 출범 2주 만의 일이었다. 경비업무의 한계를 뛰어넘는 용역직원들의 불법과 폭력에 대해 경찰은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을 사주하는 모습이었다. 사건 발생 전날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영등포구청에 공문을 발송해 농성상의 자진철거 의사를 밝힌 상태에서 벌어진 이날의 사건은 이명박 정부에서 공권력이 어떤 식으로 행사될지 보여준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자본의 욕망에 꺾인 민주주의

이미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경찰을 통해, “폴리스 라인을 넘는 시위대를 소환하겠다”, “훈방 같은 것 없이 모두 즉결심판에 넘기겠다”, “테러범 진압에 사용한다는 전자충격총(테이져 건)을 집회 때 사용하겠다” 등의 소식을 하루가 멀다 하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참여정부라 불리던 노무현 시절부터 전용철 농민이, 홍덕표 농민이, 하중근 노동자가 전경의 곤봉과 방패에 죽어가던 모습을, 그 잔인한 현실을 많은 이들이 모르쇠하던 시절을 겪어본 터라 심장조차 딱딱해져 어떤 놀라움도 없이 처연해져 있었다.

기억하겠지만 작년 10월 민주당 이상열 의원은 집회 때 신원확인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물 착용을 금지하겠다는 일명 ‘복장단속 집시법’을 국회에 상정하기도 했다. 이 법안을 발의한 이상열 등 13명 의원들의 소속위원회를 보면, 3명을 제외하고 모두 산업자원위원회 소속이다. 기업 관련한 법률들을 심의 의결하는 상임위원회에서 왜 집시법을 발의했겠는가. 자본과 권력의 입장에서 집회 시위의 자유라는 것은 골치 아픈 절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은 이명박 대통령의 입에서도 튀어 나왔다. 이 대통령은 “외국 TV에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불법·폭력 시위 모습이 비치면 국가적 브랜드 가치가 떨어져 경제 활동에도 영향을 준다”면서 시위 대책을 내 놓은 경찰을 격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청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불법 과격, 폭력 시위’는 2003년 134건, 2004년 91건, 2005년 77건, 2006년 62건으로 줄어들었다.

집회와 시위라고 하면 무조건 불법·폭력으로 매도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가치는 경제적 가치의 하위 개념으로 추락시키는, 자본의 욕망이 인간을 삼켜버린 것이다. 작년 연초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5년 발생한 집회시위로 인해 연간 12조 3천억 원에 달하는 국가적 손실이 발생했다고 한다. GDP의 1.53%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손실의 내역은 대부분 집회시위로 인해 발생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추상적 가치들로, “국가신인도 하락” 같은 것들이다. 게다가, 통계는 집회시위를 모두 불법으로 간주했을 때의 비용이라고 한다. 가정부터 불순한 통계수치로 인해 결국 집회시위는 경제적 가치와 반대편에 선, 불필요한 가치, 손해 보는 가치, 사회적 손실이 되는 가치로 추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KDI 보고서의 방식대로 하면, 1987년 민주항쟁은, 1980년 광주항쟁의 경제적 가치는 무엇일까. 군사정권의 종식을 끝낸, 절차적 민주주의를 일궈 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소위 선진국의 문턱에 올려 놓은 민주주의의 가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자본의 욕망은 그러한 질문조차 틀어막고 있다. 잔인한 시절의 도래다.

다시, 민주주의

이윤의 극대화와 기업경쟁력을 위해, 우리사회가 쌓은 소중한 가치들이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있다. 노동자의 파업권, 단결권이 무시되고 사회적 약자들의 표현의 자유가 폭력 시위라는 이름으로 시르죽고 있다. 불법적인 체포와 구금은 난무하고 있다.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법원과 검찰은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벌금형량을 높이고 손해배상과 가압류의 민사적 조치들을 남발하며 가난한 이들의 자유를 내리 찍고 있다. 마치 벼랑 끝에 맞바람을 맞으며 양팔을 벌리고 저항하고 있는 듯 암담할 때가 무수하다.

그래서 다시, 민주주의다. 살해당하고 고문당하고 그래서, 싸워서 쟁취해 온 민주주의를 그깟 돈 몇 푼과 이기적 욕망 앞에 다 내어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법을 앞세운 폭력 앞에는 불법으로 맞설 수밖에 없고, 백골단을 앞세운 폭력 앞에는 저항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오늘 아침 찾아간 기자회견장 옆에는 예의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다. 그 폴리스 라인을 가볍게 넘어 경찰들과 가까이 선 채,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폴리스 라인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내 마음에 어느 누구도 금기의 영역을 만들 수는 없다. 다시, 민주주의. 소외와 차별을 넘어 자유와 평등, 그런 것들을 지키기 위한 출발선 앞에 우리는 다시 서 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다.

덧붙임

박진 님은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