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 오후, 결국 청와대는 1분 30초의 녹화영상으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다. 한 나라의 정치와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어마무시한 내용에 비해 내용도 형식도 갖추지 않은 사과였다. 아니 이제 ‘대통령의 사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상황에 치달았지만 그는 그조차 깨닫지 못했다. 평소 세상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기에 쉽게 생각했으리라. 박근혜 씨는 최순실 비선실세의 국정 관여를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을 뿐이고,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변명했다. 중요한 공적 지위에 있는 대통령이라는 자가 공무(연설문, 외교정상대담, 인사 등)를 ‘개인적인’ 친분의 인물에게 맡겼다는 것도, 그것을 ‘순수한 마음’이라고 일컫는 것도 기가 막힌다. 비공식라인의 존재를 개인적이라고 표현하고 사익을 순수한 마음으로 치환했다. 그는 최순실의 국정관여의 시기와 내용이 크지 않다고 해명했으나 그것은 결국 비선실세의 존재를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비선실세란 통제되지 않는 권력의 정점
최순실 비선실세 문제는 K스포츠-미르재단 설립과정에서 기업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고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학비리에 관여하는 등 부정부패에 그치지 않는다. 최순실이라는 비선이 공적 권력, 공적 공간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최순실은 어떤 공적 지위도 없지만 대통령의 연설문을 사전에 보았을 뿐 아니라 외국정상과의 통화 내용 등 민감한 외교사안과 대북상황도 보고받았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그는 몇몇과 논의하기까지 했다. 최순실을 비롯한 비선세력들이 공식적인 정무라인, 행정라인에 개입해 인사도 하고 징계도 하였다. 우리가 모르는 정부가 있는 셈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제도가 있는 나라에서는 국가운영을 위해 시민들이 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대통령은 법적 기준에 맞게 관료들을 임용하는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추인하며 공권력을 집행한다. 국가기구의 운영은 국민들의 감시와 평가, 견제가 가능하도록 점점 공개적이고 투명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그런데 최순실게이트에서 드러났듯이 박근혜 정부는 투명성과 거리가 멀게 중요한 공적 기구의 운영을 어떤 공식적 추인도 받지 않은 특정 개인(집단)이 흩뜨려놓게 했다.
공권력의 내용과 행사범위가 법에 의해 그 권한과 역할이 제한된 이유 중 하나는 사익 집단이 공공성을 훼손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가 그 선을 넘으면 직권남용이고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인 까닭이다. 그런데 최순실은 어떤 공적 지위도 없다. 통제 받지 않는 비밀의 권력이었다. 공개되고 공식적으로 추인된 공권력도 사회구성원들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존중되고 그들의 참여와 감시가 보장되지 않으면 통제되지 않는다. 하물며 비밀 권력은 어떠하겠는가. 이들의 결정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그들이 ‘어떤 논의과정을 거쳐 어떤 문제의식으로 결정을 내렸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책임도 물을 수도 없다. 비선실세란 통제되지 않은 권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권력의 사유화가 어디까지 가는지, 극명한 형태로 보여준다. 비선실세의 국정개입은 국가기록물관리법 위반, 공무상 비밀누설죄 등의 실정법 위반일 뿐 아니라 국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정치(한 나라의 운영)가 어떻게 되는지 국민들은 알 수 없게 만들며 국민들을 소외시킨다. 공공의 것이어야 할 정치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정치를 왜곡하고 정치에 대한 권리를 침해했다.
민주주의의 왜곡
모든 인간의 보편적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권선언은 모든 이의 정치에 대한 권리를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보편적 인권선언을 했음에도 선거권을 비롯한 인권이 모두에게 보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민중들은 자유와 평등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싸웠고 그렇게 자유와 평등의 권리와 이념은 확장됐다. 참정권도 함께 확장됐다. 정치란 정치인이 하는 의회정치에 한정되거나 투표권 행사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정치공동체에 사는 구성원이 공공의 공간에서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게 하기 위한 모든 행위들을 포괄한다. 정치가 민중이 정치주체로서 그 사회공동체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과 수단을 넓히며 실천하는 것이라 할 때, 최순실의 국정개입은 정치에 대한 권리 침해인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 침해이다. 정치에 대한 권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1인1표의 대의제민주주의, 정치체제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87년 대통령 직선제 쟁취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란 선거권으로 이해되곤 했으나 민주주의-(民)이 주인 되는 정치란 투표권으로 달성될 수 없다. 그런데도 대통령이란 자가 소수의 재벌을 위한 정책만 펼치는 사이 노동자 시민의 인권은 내팽개쳐졌다. 노동자민중이 배제되는 불평등의 정치가 사회에 수용되고 확장됐다. 공공의 영역은 더 많이 사유화되고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 실업자로 떠밀렸고, 농민들은 일해도 먹을 게 없는 상태로, 여성,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 성소수자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상태에 처했다.
불평등의 정치 이제는 그만하고 물러나라
최순실의 국정개입으로 정치에 대한 권리가 훼손당했음을 확인하기 전에도 우리는 정치의 실종, 공공성의 실종을 숱하게 경험했다. 경제를 살려야한다며 재벌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정부에 의해 경제적 정치적 불평등의 질서는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됐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개헌 운운하며 국민들을 우롱했다.
대통령이 개헌의 근거로 삼았던 북한대결 상황과 경제 악화도 불평등의 정치를 고수하는 한 해결될 수 없다. 대북 긴장관계는 미국의 군비경쟁체제에 합류하며 성주와 김천에 사드배치까지 결정한 정부로 인해 심해졌고 동북아평화체제까지 위협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경제 악화에도 변함없이 수익률과 사내유보금이 늘어가는 재벌의 경제질서를 논하지 않은 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인 양보와 책임을 전가하는 정부의 노동개악으로는 경제, 즉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질 수 없다. 개헌 연설에서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적 정책현안을 함께 토론하고 책임지는 정치는 실종”됐다고 했지만 그 원인은 자신이 한 전쟁정치와 친재벌 반노동정치에 있지 않은가.
배가 침몰했으나 구조하지 않아 304명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 정당한 집회시위의 권리를 행사하다 목숨을 잃은 백남기 농민, 기업주의 탐욕을 부추기느라 노동자와 시민의 안전은 도외시한 외주화 정책, 파견노동 확대로 끊이지 않는 안전사고로 인한 죽음들. 헌법에 명시된 노동자의 파업권 행사를 불법으로 낙인찍고 노조를 불온시하는 정부, 핵발전소가 있는 경주일대에 지진이 나도 대책 수립조차 하지 않는 정부, 가계부채 1300조로 드러나는 서민의 생계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복지도, 최저임금도 손대지 않는 정부. 이렇게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불평등의 정치를 목도했다. 이제 박근혜 씨는 민주주의의 왜곡을 그만하고 물러나야 한다. 우리는 불평등의 정치를 바꾸기 위해 곳곳을 민주주의로 물들이고 곳곳을 광장으로 만드는 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노동자 시민이 힘을 갖도록, 부조리한 권력에 맞서 함께 거리로 나서자!
덧붙임
명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