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예상했던 질문인데 조금 떨렸다. 낙태*를 불법화해서는 안 되고 허용 기준을 현실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약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문득 ‘내게 낙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긴 이후의 일이다. 답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낙태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미 했다는 사실을 말하기 어려워하는 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건조하게 대답했다. 아주 짧은 순간, 나도 낙태를 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온통 여성들밖에 없던 부엌에서도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행히 숙모는 이렇게 말을 받아주었다. “그래. 낳으면 좋고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범인이 아니다.
‘비도덕적’ 임신중절수술
몇 년 만에 다시 ‘낙태’가 사회적 쟁점이 되었다. 보건복지부가 입법예고한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개정안이 계기였다. 1회용 주사기를 재사용한다거나 환자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는 등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한 의료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니 말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거기에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을 위반하여 임신중절수술을 한 경우’를 끼워 넣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발끈하면서 논란이 일었고, 여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2010년 2월 이명박 정부는 ‘불법 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2009년 대통령 직속 기구인 미래기획위원회에서 저출산 종합대책으로 불법 낙태 단속을 논의하기 시작한 결과 마련된 계획이다. 참여정부 시절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만들어진 후 저출산 문제에 고심하던 정부가 임신중절에 관해 종합계획을 낸 것은 처음이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낙태 수술을 신고하고 정부는 신고센터를 만드는 등 손바닥을 마주치며 낙태를 단속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불법 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의 첫 번째 세부 과제는 “생명 존중 사회분위기 조성”이었다. 정부한테는 인구 증식 기계, 병원한테는 돈벌이 재료밖에 못 되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도 억울한데 여성들은 생명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 취급까지 당해야 했다. ‘비도덕적’이라는 낙인은 낙태를 줄이지 못한다. 이미 낙태 여부를 고민하는 여성들의 가장 큰 부담은 “낙태는 살인과 같다는 생각”이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아서 낙태를 하게 되는 여성은 없다. 낙태를 하기로 마음먹고도 차마 병원을 찾아가지 못하는 여성도 있다. 결정을 하기도 어렵거니와 실행에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낙태를 금지하거나 처벌을 강화하면 낙태가 줄고 출산이 늘 것이라는 기대는 완벽한 오판이다. 법제도의 운영과 낙태 시술 빈도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다. 가톨릭 전통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사회적 금기도 강하고 처벌도 엄격하다. 하지만 허용기준이 폭넓은 유럽의 국가들보다 낙태 시술 빈도는 더 높다. 한국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낙태 허용 기준은 엄격하지만 낙태율은 높은 수준이다. 혹시나 낙태 기준을 완화하면 낙태가 늘어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기준이 현실화될수록 낙태 시술 빈도가 줄어들며 시술로 인한 모성사망도 감소하는 것이 진실이다. 태아도 여성도 덜 죽는다는 말이다.
죽음을 피하고 싶은가
낙태는 여성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출산을 하지 않게 되더라도 수정란이 착상하는 순간 나와 같은 피로 연결된 존재가 태아다. 여성 몸의 일부이자, 여성이 품은 또 다른 생명이다. 태아를 떨어뜨린다? 낙태는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는 것 같은 일이 아니다. 전신마취의 어둠 속으로, 다시 임신을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불안함으로 자신의 몸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자신 안에 함께 했던 인연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많은 여성들이 임신을 하고 축하를 받는다. 그런데 어떤 여성은 임신 사실을 알리는 것조차 막막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원치 않는 임신이 확인됐을 때 여성은 자신의 몸을 걸고 삶을 결정해야 한다. 살아온 시간, 맺어온 관계, 해온 일, 누려온 기회,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결정이다. 여성이 온몸으로 온 삶을 걸고 낙태를 고민할 때 여성에게는 목소리가 허락되지 않는다. 법이 허용하는 기준인 강간에 의한 임신이든 법이 허용하지 않는 사회경제적 사유든 여성에게 허용된 말하기란 죄를 고백하는 것밖에 없다. 친구나 가족들에게조차 터놓기 어렵다.
낙태를 남성이 강요하는 경우도 많다. 아이를 낳으면 헤어지겠다, 혼자 키워라, 결혼 안한다, 내 아이 맞느냐는 등 여성에게 책임을 돌리며 강요한다. 출산을 기대하는 남성보다 차라리 솔직한 것일지도 모른다. 책임지기 싫고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사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말이다. 사실 남성들로서는 출산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국가가 법제도와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출산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출산은 기본이고 낙태는 선택이 된다.
임신에서부터 출산, 양육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국가는 ‘여성’의 문제로 규정한다. 이것은 모두의 문제다. 남성과 여성이 다르게 겪는 문제일 뿐이다. 국가는 남성에게 무책임의 보증수표를 쥐어주고 여성에게 책임의 굴레를 씌운다. 출산은 ‘여성’의 책임이 되고 낙태는 ‘여성’의 죄가 된다. 국가는 아무 것도 걸지 않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낙태는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대립하는 문제인 것처럼 논평할 뿐이다. 결정이라니! 출산도 할 수 있고 임신중지도 할 수 있을 때 결정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출산은 의무, 낙태는 범죄일 때 여성의 결정은 불가능하다. 삶에 대해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도록 몰아넣어서 빚어진 결과를 여성의 결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눈속임일 뿐이다.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
낙태는 삶의 어떤 순간에 갑자기 들이닥쳤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다. 임신과 그 이전의 시간들로부터 찾아들어와, 임신중지와 그 이후의 시간들로 스며들어 이어지는 경험이다. 어떤 여성도 낙태를 원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고 싶은 여성과 낳고 싶지 않은 여성이 있을 뿐이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아이를 낳고 싶은 여성이 아이를 잘 낳아서 기를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여성이 낳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면 된다.
난임 시술 지원도 좋고 보육 지원도 좋다. 결혼하지 않고 출산하는 여성을 지원하는 것도 좋다. 아이를 낳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여성에게 출산의 의무가 없다는 정도의 상식은 지켜야 한다. 여성은 돈보따리 쥐어주면 아이 낳는 기계가 아니다. 피임 방법에 접근성을 높여서 원치 않는 임신을 줄이는 것도 좋다. 단, 그 전에 정신 차려야 할 남성들이 있고 그게 낙태를 줄이기 위해 가장 시급하고 긴요한 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임신과 출산을 포함하여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권리로 이해할 때 여성도 살고 태아도 살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잘 알수록,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더욱 능동적으로 실행할수록, 더욱 자유롭게 말하게 될수록 낙태는 줄어든다. 남성이 임신과 출산을 더 책임질수록, 타인에 대한 폭력을 자신의 섹슈얼리티로 정당화하려는 생각을 버릴수록, 낙태는 줄어든다. 그런데도 여전히 낙태가 죄라는 말만 떠드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태아의 생명을 빼앗은 범인이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의 강경한 입장에 정부는 한발 물러설 기미다. 보건복지부는 입법예고안에서 임신중절수술 관련 부분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여성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비도덕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때 그게 결국 여성들을 향한 것임을, 그것이 여성에게서 권리를 박탈하는 해묵은 수법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여전히 낙태가 죄라면 여성들은 범인을 처벌할 것이다.
*‘낙태’는 태아의 죽음을 강조하며 여성에 대한 낙인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지는 말이다. 여성의 의사결정을 존중하는 의미의 ‘임신중지’나 의료행위를 지칭하는 ‘임신중절수술’ 등의 말이 적절한 용어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낙태’가 죄라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사회가 함께 져야 한다는 취지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낙태’라는 말을 쓴다.
덧붙임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