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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윤석열 탄핵 심판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탄핵 찬반을 넘어 평등한 민주주의를 향해

2024년 12월 14일 국회의 탄핵 소추로 권한이 정지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2025년 1월 14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1980년 이후 44년 만에 계엄령 포고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고,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비롯한 헌법기관을 제압하려 했다. 이로 인해 수백만의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와 윤석열 퇴진을 외쳤고, 대통령이 파면당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정작 대통령 탄핵 심판의 과정은 6명뿐이던 헌법재판관을 추가로 임명하는 일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임명된 헌법재판관의 성향을 문제 삼으며 헌재 판결에 불복을 시사하는 극우 세력까지 등장했다. 계엄으로 시작된 소위 ‘내란 사태’는 대통령 탄핵 심판이라는 절차를 통해 수습되기보다는 윤석열과 극우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며 여전히 진행형처럼 보인다. 끝나지 않는 내란의 불안 속에서 윤석열 퇴진을 외쳐온 우리는 헌법재판소가 옳은 판단을 내리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계엄이 비상사태를 만든다

 먼저 헌법재판소가 판단해야 하는 첫 번째는 계엄을 발동하는 것이 적절했는지 여부다. 헌법 76조 긴급명령과 77조 계엄은 모두 국가긴급권 조항으로 비상사태라 부를 수 있는 예외적 상황에서만 발동할 수 있는 조항들이다. 민주주의 체제 질서로 확립된 삼권분립의 원칙을 예외적으로 깨뜨리며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방식이기에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파괴할 위험성을 내포한다. 실제로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계엄령이 선포된 역사는 한국전쟁 시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결국 이 계엄령들에 대해 뒤늦게라도 위헌, 위법했다는 사법부의 판단이 잇따랐다. 계엄 선포의 절차적, 실제적 요건을 엄격하게 따져야 하며, 이를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임을 명백히 확인해온 것이다. 이와 같은 기준에서 12.3 계엄이 절차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선포되어선 안 되는 이유는 분명했다. 계엄령 선포 전 국무회의에서 심의를 거쳐야 하고, 선포 이후 국회에 알려야 한다는 절차적 요건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점은 이미 언론을 통해 충분히 알려졌다. 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실제적 요건인 전시·사변과 같은 비상사태가 아니었다는 점도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윤석열은 계엄령 선포를 정당화시킬 어떠한 근거도 없으니 쟁점을 다른 데로 돌린다.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를 탄핵하고 정부 예산안을 삭감하며 독주하는 야당에 경고용 통치행위를 한 것 뿐이기에 사법부의 판단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긴급명령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1996년 헌법재판소는 “모든 국가 작용은 국민의 기본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한계를 지켜야” 하다고 밝힌 바 있다. 기본권 보장을 위한 한계를 넘어선 통치행위에 대해서 헌재의 판단 영역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계엄령 선포도 다르지 않다. 윤석열의 ‘고도의 통치행위’는 시민의 기본권 실현의 과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계엄을 모의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메모에서 “북방한계선에서 북의 공격을 유도”라는 내용이 발견되어 계엄을 위해 비상사태를 만들려는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비상사태가 계엄령을 선포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계엄령 선포를 위해 비상사태를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다.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위헌적 계엄령 선포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윤석열 탄핵은 찬반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

 헌법재판소가 판단해야 하는 대통령 탄핵 심판의 또다른 쟁점은 계엄령이 어떤 헌정질서를 파괴했는지다. 대통령 탄핵 심판은 대통령의 행위가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는지, 위반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판단하여 파면 여부를 결정해왔다. 윤석열의 계엄령으로 자행된 일들은 헌법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따져 묻는 것이 무색한 헌정 파괴 행위들이었다. 12.3 비상계엄 선포로 발표된 포고령은 국회와 정당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금지하며 모든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했다.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제압하겠다고 군대가 투입되었으며 이를 막는 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다. 헌법이 보장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운영원리 그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헌법의 이름으로 이런 ‘국헌문란’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는 과정으로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이 놓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과 그 지지세력들은 계엄령의 이유를 야당의 정치적 판단이나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돌리며 탄핵을 정치적 입장에 따라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구도로 만들고 있다. 국헌문란의 행위는 모른 척 한 채 말이다. 그러나 계엄령이 파괴시킨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지 우리는 분명히 목도하고 있다. 계엄령은 극우 세력 준동의 방아쇠가 되어 윤석열 체포 영장을 발부한 법원을 침탈했고, 향후 헌법재판소 판단을 불복하고 ‘휩쓸’겠다는 선전이 공공연히 등장한다. 윤석열과 국민의힘은 탄핵 심판 자체를 ‘야당이 윤석열을 파면시키고 유력 대권 주자인 이재명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선동하며 극우 세력의 폭력을 정쟁의 일부로 만들면서 정당화한다. ‘탄핵 찬반’ 구도를 첨예화될수록 계엄령 문제의 본질은 흐려지고 폭력과 파괴의 문제는 왜곡된다. 헌법재판소가 재고의 여지 없이 윤석열을 파면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다.

 

민주주의 위기가 계엄령을 선포시켰다

 윤석열의 계엄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중요한 이유는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적 합의와 질서를 파괴한 행위를 용납되지 않는다는 저지선을 사회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을 파면시키는 것만으로 파괴된 민주주의 질서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이는 단순히 극우 세력이 헌재의 판단을 거부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극우 세력이 대중적으로 결집할 수 있었던 조건이 무엇이며, 대통령이 자신의 권한을 초과해 계엄령을 마음대로 선포할 수 있다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이 사회의 조건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 조건은 계엄 이전부터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흔들려왔다는 사실이다.

 ‘진짜’ 노동약자인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영세자영업자 등을 보호하겠다며 노동시간 주 69시간 일할 수 있도록 만들고,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조건을 협상하는 경로가 되는 노동조합은 ‘가짜’ 노동약자로 매도한다. 이대남을 호명하며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며 청년의 경제적 위기를 성별의 적대로 대치시킨다. 일하는 모든 이들의 권리를 세우는 방향이 아니라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차별하는 방식으로 불만을 잠재우려하고, 학생과 교사의 권리를 대립시키며 누구의 권리도 보장하지 않는다. 사회적 참사를 국가가 나서서 책임지기는커녕 음모론에 동조해왔다.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등 소수자를 차별하는 인식을 숨기지도 않는 인사들이 정부의 요직에 임명되어 권리 체계를 부정하는 데 앞장선다. 시민의 권리를 내팽개치는 사회를 만드는데 윤석열 정권만 일조해온 것도 아니다. 시민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는 정치를 만들자는 정치개혁의 요구를 보수양당은 선거제도의 취약점을 악용해 ‘위성정당’을 탄생시켜 자신들의 의석수를 늘리는 데만 혈안을 올렸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어가지만 시민의 뜻을 모아내 이 불평등한 사회를 바꿔나갈 정치는 안중에 없던 기성정치에서 민주주의는 계속 흔들려왔다.

 세상을 나아지게 만드는 전망은커녕 내 삶을 대변하는 정치를 찾기 어려워진 조건 속에서 민주주의는 무용하게 느껴진다. 민주주의적 제도는 있지만, 이 제도에 따라 정치가 작동하지도, 권리를 보장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정체되고, 사회적 불만은 해소되지 못한 채 차별과 배제를 선동하는 극우세력을 형성시켰다. 시민의 권리는 실종되고 대통령의 권한만 남은 사회에서 윤석열의 계엄령 역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선포될 수 있었다. 계엄령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기 이전이 이미 민주주의를 무너뜨려온 정치가 계엄령 선포를 가능하도록 만들어 온 것이다.

 

민주주의를 다시 움직이려면

 윤석열의 파면은 헌법재판소의 몫이지만,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계엄령까지 선포하게 만든 정체된 민주주의를 바꿔내는 일은 광장에 나와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 우리 모두의 과제다. 윤석열의 변명처럼 6시간에 불과한 계엄이었지만, 오히려 그 짧은 계엄만으로 퇴진을 외치는 수백만의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것은 그저 대통령만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윤석열 퇴진 광장을 대표하는 2030청년, 여성,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들은 이미 무너진 민주주의 사회에서 배제되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민의 다른 이름이다.

 이들은 시민의 권리를 나중으로 유예하는 정치를 거부하고, 다른 민주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찾고자 광장으로 나왔다. 남태령에서 한남동으로 이어지는 연대를 경험하며 배제와 차별이 아닌 평등을 광장의 핵심적인 열쇳말로 만들고 있다. 평등한 광장 문화를 요구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광장의 요구로 차별금지법을 제시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불평등을 경험한 이들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회를 그대로 둔 채 대통령만 바꿀 수 없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평등의 기치를 세우고 다른 전망을 그려갈 정치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 과제를 외면한 채 윤석열만 퇴진시킨다면 극우 세력의 준동도, 또 다른 윤석열의 등장도 막아 세우기 어려울 것이다. 퇴진으로 그치지 않을 우리의 과제를 확인하고 함께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 갈 출발선을 준비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