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를 몰아내자
"공포로부터의 해방". 이는 1941년 미대통령 루즈벨트가 천명하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의 기본지침이 된 네 가지 자유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요즈음 그 구절을 기도처럼 왼다. 어쩌면 우리 현대사 자체가 바로 '공포와 두려움'의 연속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저 처참했던 한국전쟁 그리고 안보를 빌미로 남과 북에서 진행된 광포한 탄압과 폭력 ― 정말로 한반도의 대지는 그 공포 속에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바로 그 공포를 자양분으로 자라난 것이며, 동시에 그 공포를 가중시킨 음험한 괴물인 것이다. 한반도에 평화와 인권의 봄이 도래할 날은 언제일까?
지난 해 남북정상회담 후, 김대통령은 귀국 제 일성으로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다."라고 선언하였다.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말 이 땅의 현대사를 옥죄고 있던 전쟁의 위험이 사라진 것일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평화의 절박성이 느껴졌다. 한반도의 평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1999년의 서해 교전만 하여도 얼마나 위험천만한 사건이었던가? 한반도의 휴전체제는 어떤 돌발적인 사건으로도 쉽게 깨질 수 있는 불안정한 것이며, 평화를 향한 도정의 곳곳에는 수많은 변수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북한만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군사적 모험주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며칠 전 감행되었던 미국의 이라크 공습은 1994년의 북한 핵위기를 상기시켜 주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북폭 여부를 결정할 최종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우리 정부는 그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다시 생각해도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미국의 새 행정부는 대북 강경파로 구성되어 있고, 지난 클린턴정부 때와 같이 우리 햇볕정책의 노선을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시행정부가 그 추진을 공언한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는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다시 요동치게 만들고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있다. 미국이 NMD를 강행하여 동북아시아에 신 냉전과 핵군비경쟁이 촉발된다면, 그 대립전선은 어디를 경계로 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바로 우리 한반도의 허리, 곧 휴전선이 될 것이다.
다시 각성해야 할 때이다. 남-북 그리고 남-남의 분열은 외세의 부당한 개입을 불러오고 다시금 한반도를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시킬지도 모른다. 전쟁을 해서라도 북한 핵을 제거해야 한다던 페리 전 미국무장관을 설득하여 햇볕정책을 뒷받침하는 페리보고서를 낳았듯이,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역량을 다시금 증명해 보여야 할 때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모든 인권은 다시 전쟁과 폭력의 공포 속으로 함몰되어 버릴지 모른다.
◎ 정태욱 (영남대학교 법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