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영자들
"여~엉자야, 내 딸년아, 몸 성히성히성히성히 잘 있느냐, (중략) 여기에 있는 니 아빠는 사장님이 아니란다, (중략) 서울하고도 시청 앞에서 싹싹 쓰는 청소부란다. 니미씨팔 사회구조 좆도"였던가? 이제는 가사마저 가물가물해진 이 구전 가요가 떠오른 건, 산골소녀 영자 아버지가 광고출연료를 노린 '도시의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기사를 읽고서이다.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고단한 노동자들의 삶을 다소 촌스러운 신파조의 가락에 실은 이 노래가 불러내었던 '영자'는 잘날 것도, 못날 것도 없는 이 사회의 평범한 여성의 상징이었다.
자신으로선 별날 것 없이 살아가던 강원도 산골소녀 영자가 어느 날 언론에 의해 갑자기 화려하게 호명되었다. 아버지와 단 둘이서 정규교육도 받지 않은 채, 자급자족의 촌락 생활을 18년이나 해왔다는 영자의 삶은 이제는 아련한 향수 속에서나 가능해 보였을 대중들의 달뜬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삶을 상품가치로 조작하는 언론의 호들갑스러운 발빠름이 탐탁지 않았지만 몇 안 되는 주파수로만 다른 세계와 교신할 수 있었던 영자에게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탐색의 기회를 가질 권리는 있다고 위안했다. 그러나 무궁무진한 기제를 활용해 정신없이 영자의 삶에 몰아친 이 다른 세계는 유감스럽게도 그녀를 불러내었던 열의와 동일하게 그 뒷감당까지를 책임지는 그런 세상은 아니었다.
"이걸로 친구들 다 만나요"라는 광고 멘트가 사실은 휴대폰 없으면 친구 만날 생각도 말라는 무시무시한 위협일 수도 있다는 그 아이러니를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영자는 모진 세상의 파고에 휩쓸릴 것을 우려하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영자에게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약속으로 자못 언론을 탔던 이가 사기를 치기까지 했다니 안타깝게 혀를 찰 일이지만 그녀를 데뷔시켰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이름처럼 '세월 따라 노래 따라' 차차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그 거칠 것 없는 물욕의 실상이 얼마나 반인권적인 것인지 다시 성찰해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비만한 체중을 비하하는 유머로 그야말로 '영자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개그맨 이영자가 이제는 20kg을 감량하고서야 '당당한 여성'으로 복귀하는 현실을 보자니 어쩐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영자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이 씁쓸함이 당치않은 연상작용이라는 생각만은 들지 않는다.
◎ 엄혜진(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