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국가보안법 … 오라! 국가인권위
소련․동유럽의 몰락은 이 지구상에 미국의 일원적 군사패권을 가져왔다. 그 결과 과거 세계 곳곳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향해 구축된 반공 군사정권들은 용도폐기의 운명에 처하게 되고 (미국의 ‘국익’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90년대의 지구에는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의 시대가 열린다. ‘인권’의 눈으로 본 90년대의 한국은 떠나가는 국가보안법과 도래하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극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에 해당된다.
국가보안법, 몰락을 향한 긴 여로
20세기 마지막 10년간, 냉전시대의 마왕 국가보안법은 그 긴 생명을 마감하기 위한 마지막 여로에 접어든다. 91년의 UN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은 그 출발점이었고, 북을 바라보며 군침을 흘리는 ‘자본’의 요구는 남북교류와 ‘경제협력’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게다가 90년대 들어 남한 대중에게 갑자기 초라해진 모습을 드러낸 북한은 이제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국민은 과거와 달리 국가보안법을 현실적으로 ‘폐지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이 법의 ‘약발’은 확실히 떨어지고 있었다. 93년 이후 UN에서의 한국 국가보안법 논의는 활발해지고 이것은 국가보안법 제정 50주년이었던 98년에 절정에 달했다.
물론 국가보안법은 90년대에도 여전히 부패․무능 정권의 쓸만한 도구였다. 이 점은 김영삼․김대중 정권을 통해 해마다 평균 370건 가량의 국가보안법 사건이 발생한 사실, 그리고 한총련이 여전히 ‘이적단체’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실만 봐도 분명하다. 냉전은 끝났어도 냉전구조는 국제적으로 혹은 국내적으로 상당한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재벌 총수의 방북을 비롯해서 금강산 관광과 이산가족들의 대규모 상봉, 심지어는 국가원수의 방북과 정상회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들은 국가보안법이 이제는 끝내 과거의 독기를 회복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
국가인권위원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신과 설렘
한편 93년에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했던 한국의 인권운동가들은 UN이 회원국에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를 권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국내의 인권수준을 국제인권기준에 접근시키기 위해 ‘인권의 보호와 향상’만을 전담하는 새로운 개념의 국가기구… 역시 냉전질서 붕괴와 더불어 현실화된 이 제도는 오랫동안 군사독재에 시달려온 한국의 인권운동가들에게는 ‘복음’ 바로 그것이었다.
97년 김대중 후보의 대선 공약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인권위원회’를 법무부의 일개 산하기관이 될 운명에서 구해내고 독립적인 국가기구로 세운 것은 3년에 걸친 인권단체들의 끈질기고도 처절한 노력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여러 모로 우리의 인권상황에 변화를 줄 것이다. 그러나 빈약한 조사권과 권고적 효과만을 가지는 위원회가 얼마만큼 인권운동가의 소망을 실현해 줄지는 미지수이다. 현실적으로 온갖 인권침해 위에 존재하는 기득권층에 맞서 ‘국가’가 어떻게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남을 수밖에 없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시대, 그것은 인권운동가에게는 아직도 불신과 설렘이 교차하는 ‘미지의 세계’일 밖에 없는 것이다.
가라! 국가보안법 오라! 국가인권위원회
이것은 작년 겨울 혹한의 명동성당 노상에서 인권운동가들이 벌인 단식투쟁의 구호였다. 거기에는 낡은 시대를 떠나보내고 새 시대를 맞으려는 인권운동가들의 희망이 서려 있었다.
물론 역사는 직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상당한 기간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우리 사회에서 진정 인권의 향상을 가져다 줄 지 아니면 이른바 국가이익과 배치되는 심각한 인권문제를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킬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가라! 국가보안법…오라! 국가인권위원회”는 20세기를 마감하면서 큰 변화를 예감하는 한국 인권운동 최대의 ‘화두’였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