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치와 휴전상황 등으로 인한 전쟁발발의 위협은 지난 반세기의 역사동안 너무나 많은 상처를 이 땅에 남겼다. 징병제는 이 고통의 상처가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성이라면 반드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즉 총을 들고 전선에 서서 상대방(그것도 동족)의 심장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일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이다.
지난 7월 30일 부산의 한 대학생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특기할 만한 일은 이 병역거부자는 특정종교의 교리 때문이 아니라 평화와 양심이라는 내면의 의식에 따라 병역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결국 7월 30일의 이 '사건'은 상시적으로 전쟁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이상한 당위론에 대한 전면적 문제제기를 촉발했다.
국가단위가 존속하는 이상 국민이라면 어쩔 수 없이 국방의 의무를 받아들여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국방의 의무라는 것이 '당연'히 총을 들고 살인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혹시 우리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한동안 잠잠했던 지문날인 반대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30년이라는 세월동안 '당연'하게 국가에 지문을 제공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많은 사람들이 당황해하고 있다. "국민의 도리로서 국가와 사회의 안전을 위하여 자신의 지문을 기꺼이 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도 존재한다. 왜 기꺼이 제공해야 하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의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문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당연'할 것 같은 지문날인제도가 전혀 '당연'하지 않은 제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열손가락 지문을 채취하는 나라가 우리 나라밖에 없으며, 채취된 지문의 활용도도 극히 떨어진다는 사실은 지문날인을 옹호해왔던 사람들을 오히려 황당하게 만든다.
국가가 징병제를 고수하는 이유의 근저에는 언제든 국가의 마음대로 국민을 다루고자 하는 음험한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 실효성도 없는 지문날인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간단한 제도적 관리기술로 국민의 인식체계까지 조작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징병제나 지문날인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는 그 '당연함'에 대한 당위성을 찾기 어려운 제도들이다. 애초부터 '당연'하기 때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처럼 만들어져 왔던 것이다.
'당연'하니까 '당연'한 것이라는 논리는 동어반복일 뿐이다. '당연'하면 안 되는 일이 '당연'하게 벌어지는 사회에서는 마땅히 '당연'해야 할 일들이 '당연'하지 않은 일로 전락한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 인권은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이러한 현상도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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