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분쟁과 병역기피자
2013년 10월 징병제를 중단시켰던 우크라이나는 이듬해 4월부터 시작된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과의 분쟁 속에 징병을 다시 시작하기로 발표한다. 20만 우크라이나 군대에서 징집병이 차지하는 비율은 40% 정도(위키피디아 자료). 어림잡아 8만명 가량이 징집된 군인인 셈이다. 그런데 올 초 우크라이나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병역기피 혐의로 재판 중인 숫자가 7500명이란다.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그러니까 국가에 붙잡히지 않고 도망다니는 이들까지 더하면 징병 대상자의 10% 이상이 징집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이 징집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다양하다.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에 입각한 이들도 있고, 같은 동료 시민을 향해 총을 들고 싶지 않은 이들도 있고, 정말 말 그대로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아 도망친 사람도 있다. 그럼 이들은 병역거부자인가, 비겁한 병역기피자인가? 자기 생각을 종교적 근거든 사상적 배경이든 그럴 듯한 언어로 포장할 수 있는 사람은 병역거부자이고, 단지 죽을까 무서워 징집에 응하지 않은 사람은 병역기피자? 종교적 이유로 한정하긴 했지만 어쨌든 병역거부권이 인정된 우크라이나에서 위의 사람들 중 병역거부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는 누구일까.
병역기피자의 도피처가 된 베를린
2차 대전이 끝난 독일. 나치의 군대가 벌인 전쟁범죄에 대한 비판적 여론의 눈치를 보던 서독 당국은 1956년 징병제를 도입했다. 냉전 분위기가 고조되던 1962년 동독 역시 징병제를 도입한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병역거부권은 징병제 도입 초기부터 보장되어 있었다. 서독은 아예 헌법에 병역거부권을 명시하고 있었고, 동독은 1964년 사회주의 국가로는 최초로 비전투분야에서의 대체복무를 허용했다.
이번에 독일에서 만난, 지금은 60대를 앞둔 활동가들과 얘기하면서 놀랐던 게 두 가지 있다. 겉보기엔 ‘남성적’ 포스가 철철 풍기는데도 대체복무자라고 말할 정도로 군대 간 사람보다 대체복무를 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 또 하나는 70~80년대에 20대를 보낸 그들에겐 군대냐 대체복무냐의 선택지 외에 베를린으로 ‘기피’하는 방법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2차 대전 종료 이후 소련군과 미군, 영국, 프랑스 군에 의해 분할 지배가 이루어졌던 베를린에는 독일군이 주둔할 수 없었고, 서베를린에서는 징집이 실시되지 않았다. 한편, 병역거부권이 존재하긴 했지만 1983년까지는 자신의 양심을 심사받는 면접이 있었고, “당신의 여동생이 옆에서 강간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총을 들지 않을거냐”식의 고전적인 질문이 당시 독일에서도 횡행했단다. 병역거부자로 인정받기 위한 그런 심사도 싫었던 이들 중에는 동독 영토를 가로질러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의 차를 얻어 타는 모험을 감수한 이들이 있었다. 통일이 된 90년까지 이렇게 병역을 기피한 이들의 숫자는 4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통일이 되자마자 베를린 시민들도 징병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시점을 기준으로 과거 14년 이내에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서베를린으로 이주한 만 32세 이하의 남성들도 포함이 된다는 국방부의 발표가 나온다. 이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온 5천명의 시민들이 외친 구호는 징병제 폐지였다. 징병제 폐지 주장 이면의 근거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그렇게 마음대로 침해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한 이도 있고, 반전과 반군사주의의 가치를 말한 이도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표면상 군대에 가고 싶지 않다는 이들은 그럼 병역기피자인가 병역거부자인가?
‘비겁함’에 대하여
‘비겁함’이 낙인으로 작동하는 극적인 경우는 ‘용감한 남성’이라는 이미지와 결합할 때이다. 군대가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남성상이 ‘연약한 여성을 지키는 용감한 남성’이기도 하다. 그런 용감함의 맞은편에 ‘비겁한 병역기피자’라는 딱지가 있다. 용감한/비겁한 남성이라는 이분법 속에 병역을 거부하고 스스로 감옥에 들어간 이들은 ‘떳떳한’ 혹은 ‘용감한’ 병역거부자가 되기도 한다. 때로 병역거부자가 ‘죄 없이 옥살이를 한’ 불쌍한 존재로 여겨지는 딱 그만큼 병역기피자는 더욱 더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병역거부 운동 초창기에 하도 욕을 먹다보니 ‘군사훈련만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허나 이는 ‘어떤 고생이나 의무도 지지 않으려는 병역기피자’와의 구별을 뚜렷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미 많이들 지적했지만, 의도했든 안 했든 그렇게 ‘용감한 거부자‘와 ’비겁한 기피자”의 구별이 생기면서 애초 병역거부로 저항하고자 했던 기존 가부장제의 남성성은 오히려 더 공고해진 측면이 있다.
군사화 된 남성성을 해체하기 위해선 ‘비겁한’ 병역기피자들의 존재가 그래서 더 중요하다. 군대의 본질은 결국 ‘방어’란 이름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는 공간이다. 상대를 죽일 가능성만큼 자신이 죽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싶은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이런 병역기피를 누군가 비겁하다고 말할 때 비겁한 게 아니라고 반박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비겁함’이 구성되는 방식을 문제 삼고 그런 낙인을 남발하며 이득을 보는 자들은 누구인지 지목할 수 있어야 한다.
병역기피와 완전거부는 어떻게 만나나
91년 독일에서 병역거부를 신청한 이의 숫자는 15만명. 통일 당시 35만명이던 독일군의 절반 가까운 숫자가 병역거부를 신청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들린다. 여기에는 걸프전에 독일군을 파병할지 말지 사회적으로 논쟁이 뜨거웠던 배경이 있다. 예비군 중에도 7천명이 파병에 반대하며 병역거부를 선언했다고 한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여전히 지배적인 독일 사회의 분위기 속에 자국 방어 목적이 아닌 다른 분쟁에 독일군을 파병하는 것을 반대하는 여론의 탓도 있었겠지만, 동원될 당사자인 군인들이 참전을 거부했기에 독일군 파병은 없던 일로 마무리되었다. 전쟁에 반대한다는 신념과 나치 군대의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는 역사의식, 그리고 자신이 군인으로 끌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 세 가지를 과연 무 자르듯 갈라낼 수 있을까? 너는 이런 이유니까 병역기피자 너는 저런 이유니까 병역거부자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더러 인간의 양심과 신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고려하지 못한 무모한 발상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성적 판단만큼이나 본능적 두려움과 같은 감정의 지배를 받는 존재다.
서두에 언급한 그이가 앞으로 병역을 거부할지 공익을 갈지 아니면 신체검사 자체를 거부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이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평가, “전쟁에 반대한다면서 공익은 가는 자신이 비겁한건 아닌지” 그 이면의 마음을 살피면서 ‘병역기피’에 대해 서로 더 고민을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단 바람은 있다.
병역거부와 기피의 구분이 모호한 사회일수록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라는 지배적 통념이 도전 받는 곳일 가능성이 높다. ‘군인은 명령에 따라 살상하는 기계이고 거기에 동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또 다른 공통의 감각이 동시에 경합하는 것이다.
병역기피 의혹을 받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에 대한 분노가 군대 안 가는 여성과 장애인들에 대한 혐오와 결합하면서 더 ‘평등한’ 군복무를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분노가 살상훈련과 복종의 문화에 포섭되는 것을 누구든 거부할 수 있다는 상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고민해본다. 이런 맥락에서 병역기피를 옹호하는 것은 군인이 되는 것 뿐 아니라 징병제를 전제로 한 대체복무까지도 거부하는 ‘완전거부(total objection)’의 논리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병역기피와 완전거부 둘 다 결국은 징병제와 군대에 대한 저항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독일과 핀란드의 사례를 중심으로 완전거부의 맥락과 사회의 군사화가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 살펴보겠다.
덧붙임
날맹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이며, '전쟁없는세상'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