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인권위 회의장 가득 메운 침략국 미국의 오만
3월 17일 59차 유엔 인권위원회(아래 유엔인권위)가 개막됐다. <하루소식>은 다음달 25일까지 열리는 유엔인권위 소식을 팍스로마나 사무국장 이성훈 씨를 통해 매주 전하기로 한다. <편집자주>
59차 유엔인권위가 17일 6주간의 일정으로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개막됐다. 개막식은 임박한 이라크전쟁 때문에 침체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이번 회기의 의장인 리비아 알 하자지 씨는 개막연설에서 "어떤 명분이든 전쟁은 인권 침해, 특히 생명권의 침해를 낳게 마련"이라며 "인권의 관점에서 전쟁 방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일 새벽(제네바 시각) 우려했던 전쟁이 터졌지만, 당일 오전 분위기는 너무도 차분했다. 일부 대표가 긴급사태에 대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지만, 대다수 외교관의 얼굴에는 분노보다는 체념과 무력감이 역력했다. 반면 회의가 열리는 유엔건물 주변은 제네바의 미국 대표부에 대한 항의 행진을 벌이는 고등학생들의 분노가 가득해 대조를 이뤘다. 이는 스위스 역사상 처음 있는 동맹휴업이었다.
"유엔 무시한 미국 참석 모순 아닌가"
유엔인권위 미국 대표단은 20일 오전 관례대로 브리핑을 개최하고, "인권침해 국가로 알려진 리비아가 의장국으로, 짐바브웨가 위원국으로 인권위에 참석하는 것이 유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대다수가 기대했던 전쟁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에 한 인권단체 대표가 유엔 안보리의 승인없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유엔헌장 위반인데 유엔헌장에 의해 설립된 유엔인권위에 참석해서 인권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대표단은 예상한 질문이라는 듯 "이라크와의 전쟁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 678호와 1441호에 따른 합법적인 것이며, 전쟁 이후 이라크 인권상황이 매우 개선될 것이니 지켜 보라"고 말했다. 무력사용이 이라크의 인권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한편 첫 나흘 동안 정부대표 연설이 이루어지는 동안 다른 회의를 진행하지 않기로 내부방침을 정했지만, 사태의 긴박성 때문에 정부간 비공식 긴급 논의가 활발히 전개됐다. 이슬람국가연합(OIC)과 아랍국가및비동맹연합(NAM) 국가들이 인권위에서 이라크 사태에 대한 특별토론을 하는 안을 논의했지만,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반대에 부딪혀 공동의 입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사태는 인권위와 전혀 관계없는 안보리의 문제라며 논의 자체를 반대하고 나섰다.
"인권고등판무관, 미 침공 입장 불명확"
한편 지난해 말 새로 임명된 서지오 드 멜로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은 호소문을 발표, 전쟁당사국이 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의 원칙에 따를 것을 호소했다. 이에 대해 일부 인권단체들은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은 명백히 유엔헌장과 인권법 위반임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매우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일부 단체들은 이번 사태의 반인권성과 인권위의 역할에 대한 공동의 입장을 마련해 인권위에 제출할 예정이다.
일본군위안부, 병역거부문제도 다뤄져
올해 유엔인권위에서는 한국과 관련한 몇 가지 인권문제가 다루어질 전망이다. 지난 10년간 유엔인권위의 주요 인권문제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올해에도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전시 성노예와 여성폭력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 라디카 쿠마라스와미의 최종보고서 채택을 계기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과 국가보상 권고 불이행에 관한 후속조치가 논의될 것으로 보여 결과가 주목된다. 특히 이번 최종보고서 제출 이후 특별보고관의 임기가 끝남에 따라 후속작업에 대한 논의가 중요한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격년제 원칙에 따라 올해 결의안이 채택되지는 않지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도 의제에 포함됐다. 최근 한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친우봉사회(퀘이커) 제네바 대표부의 레이첼 브렛 씨는 이번 회기에서 서울 회의의 후속으로 국가인권위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유엔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말해 이에 관한 물밑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북한인권 결의안도 제출될 예정
한편 이번 인권위에서는 북한 인권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질 전망이다. 이미 유럽연합과 미국은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제출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한국정부도 대북 인권결의안 제출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면 미국은 관례와 달리 이번에는 중국에 대한 인권결의안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지 않아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인권전문가들은 이라크전에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은 중국과 모종의 타협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제네바 : 이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