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법원은 이른바 '안풍' 사건 관련자들에게 실형과 더불어 총 856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당시 여당의 선거 자금으로 불법적으로 사용됐던 1천억원 이상의 돈 중 안기부 예산에서 지원됐던 돈이 856억원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을 보는 국민들은 자신의 세금으로 이뤄진 안기부 예산이 당시에 어떻게 특정 세력의 정권 유지 수단으로 무단 전용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분노는 할지언정 그다지 새삼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중앙정보부, 안기부를 거쳐, 지금의 국정원에 이르기까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정권 안보 기관으로 기능하며 숱한 권력 남용과 인권침해를 자행해왔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길 교수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 의문의 죽음에는 이 정보기관에서 자행한 고문과 사건 조작, 공작 정치가 있었다. 1987년 발생한 '수지 김 살해 사건'에 대한 은폐와 조작은 심지어 2000년도까지 계속됐다. 도청 의혹, 사찰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국정원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정권의 안보를 위해 권력자들은 이 기관의 힘을 의지했고, 비밀스런 정보기관은 그래서 온갖 불법과 탈법을 일삼아왔다.
국정원이 국민의 통제에서 벗어난 '비밀의 성'으로 남아 있는 한 이런 문제는 언제나 잠복해 있을 수밖에 없다. 수사권까지 갖고 있는 정보기관인 이상 무엇이라 이름을 바꾼들 국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하기에 주요 정당의 후보들마저도 지난 대선에서 하나같이 국정원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국정원 개혁 논의의 핵심 축은 국정원의 수사권을 완전 폐지하고 정보 수집 기능은 해외 정보에 국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기관의 민주화는 국정원의 활동과 예산에 대해 국회의 통제를 강화하고, 국가기밀, 비밀 활동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새 정부 들어서도 국정원의 근본적 개혁 움직임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도리어 정보기관에 정부 부처를 지휘,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주자는 테러방지법이 다시 추진되고 있는 판국이다. 국정원에 대테러센터를 새로 설치해 관계 기관의 대테러 활동을 총괄 지휘하도록 한다니 옛 남산 시절의 통제불능의 권능을 가진 정보기관으로 부활시키자는 것인가?
정부는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를 당장 중단하라. 반대로, 국정원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개혁 작업에 더 이상의 지체 없이 나서라.
- 2424호
- 2003-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