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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국민이 직접 법안을 발의하고, 결정한다"

직접민주주의의 엔진을 돌려라 (하) '국민발의제'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국민들의 항의행동이 매일 밤 촛불로 타오르고 있으며, 오늘은 전국에서 1백만 명이 모일 예정이다. 이런 국민들의 항의 행동에 의해 탄핵을 주도한 한-민-자 3당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반면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40%대를 웃돌아 이번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한다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국면에서 아직은 소수지만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정치적 권리의 각성이 논의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루소가 신랄하게 비판했듯이 대의제란 것은 "선거 바로 다음날부터 주권자인 국민을 통치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정치제도"임을 자각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대의민주제에 대한 대안 정치제도로 최근에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 '국민소환제'와 더불어 '국민발의제'이다. 국민발의제는 국민이 헌법개정안이나 법률안을 제안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여기에는 일정 정도의 요건을 갖춰 제안되는 법안을 직접 국민투표에 부치는 직접발의와 의회의 의결 뒤에 그것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간접발의가 있다. 국민발의의 전제는 국민투표다. 의회가 의결한 법률이라고 해도 국민발의에 의해 국민투표를 거쳐 폐기시킬 수도 있다.


제 입맛대로 법률을 만드는 국회

지난 달 가까스로 국회를 통과한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법률'의 국회 심의 과정에서 친일파의 후손인 한 법사위원의 반대로 인해 법안은 누더기로 변했다. 또 청송보호감호소의 피감호자들이 여섯 차례나 단식농성을 하면서 법률의 폐기를 요구하였고, 여야가 폐지를 당론으로 정하고 법안까지 제출한 '사회보호법폐지법률안'은 국회 법사위에서 심의조차 되지 않았다. 최근 불복종운동의 주대상이 되고 있는 집시법의 개악 과정에서 국회는 그 흔한 공청회 한번 하지 않은 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개악안을 137명 의원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파병 동의안이나 한-칠레 FTA 비준안도 여야의 합작으로 가결되었다.

주권자인 국민의 대표들은 국회에서 국민들의 이익이나 요구는 무시한 채 자신들만의 법률을 만들고, 이를 국민에게 지킬 것을 강요한다. 바야흐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규정은 헌신짝처럼 던져지고, 국민은 무기력한 통치의 대상일 뿐이다. 국민들은 국회밖에 모여 허탈하게 집회나 하고 소주잔이나 기울이면서 욕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 사회에 국민발의제가 도입된다면 어떻게 될까? 국민발의제가 도입되어 법안 제정을 요구하고, 통과된 법안이나 정책도 국민투표에 붙여져 결정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국민발의제에서는 입법할 수 있는 권리를 국회의원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행사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1962년 개정헌법에 국민발의를 인정한 바 있다.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발의를 인정했던 헌법이 69년 개정되면서 국민발의는 지금까지 잊혀진 권리가 되고 말았다.


스위스 국민발의제

앞서 국민소환제를 다룬 글에서 근대시민혁명 초기의 직접민주제의 구상에 대해 살펴보았기 때문에 그 연원을 여기서는 굳이 재론하지 않는다. 다만, 대의제가 한계에 도달하고 의회가 대표성을 상실하였을 때 각국은 근대시민혁명과정에서 폐기하였던 직접민주제를 하나하나 찾아 보완해갔다. 국민투표제와 국민발의제는 미국의 각 주 헌법, 독일기본법 등에서 인정되고 있으며, 일본의 지방자치제에 있어서도 조례의 제정, 개폐를 청구하는 형식으로 이 제도가 부분적으로 채택되고 있다. 최근 우리 나라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이들 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했고, 올해부터는 주민투표제도가 시작된다.

직접민주제의 대표 격인 나라는 스위스다. 스위스는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시기에 연방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제를, 1874년에 국회를 통과한 법률안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는 법률결정 국민투표제를 도입했고, 1891년 연방헌법에 대한 국민발의제, 1921년 특정 조약에 대해서도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받도록하는 국민발의제를 도입했다. 스위스의 법률결정 국민투표제의 경우는 유권자 5만 명(전체 유권자의 1.1%)이 국민투표를 발의하여 국회가 의결한 법률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제도이다. 또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는 유권자 10만 명(전체 유권자의 2.2%)의 발의로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 물론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더욱 광범한 국민발의권이 인정됨으로 재정에 관한 국민투표, 법률안의 발안도 적극 도입되어 있다.

19세기 중엽 스위스의 권력은 철도회사 사장, 은행가 등 자유주의적 자본가들이 장악했고, 권력은 이들 특권층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이런 권력 집중현상에 항의하는 민중들의 투쟁은 1867∼69년 쮜리히 민주화투쟁으로 표출되어, 이러한 직접민주제의 도입이 본격화되었다. 그 여파는 다른 주에도 미쳐 스위스 연방에 직접민주제가 안착되게 된다.


정치적 자유를 확장하자

국민발의제는 토론이나 서명 등의 정치행위를 동반함으로 국민들은 자연스레 정치적 소양을 쌓게 된다. 국민발의 과정에서 그 법안의 취지와 목적을 이해하게 되어 제기하는 법안의 전문가가 된다. 물론 국민발의제가 완벽할 수는 없다. 최근 미국이나 일본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자기 지역 이기주의적인 결정이 자주 나오게 되는 것이 부정적인 사례다. 그렇지만 국민소환권과 함께 국민이 직접 입법권을 챙긴다면 오늘날의 대의민주제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탄핵국면은 우리가 군사독재정권 이래 빼앗긴 정치적 자유에 대한 자각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