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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타리의 인권이야기]장애여성과 노동에 대한 설익은 고민들

장애와 노동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기 시작하면 이런저런 난관들에 직면한다. 장애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무엇이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에서부터 노동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들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을 매번 경험하게 된다. 게다가 장애여성입장에서 보면 장애인 중에서도 남성가장을 우선시하는 노동시장의 성차별적인 구조와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동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로 엮이게 된다. 중증장애를 가진 여성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노동의 권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불로소득을 취하거나 자본가들, 놀고먹는 사람들을 탓하는 말로 자주 쓰이지만 어쩌면 이 말은 장애여성에게는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이라는 것은 ‘돈을 버는 것’과 동일시되고 ‘놀고먹는다’는 것은 무능력하거나 무책임하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모든 노동이 ‘돈을 버는 것’으로 대체되고 ‘돈을 벌지 않는 것’은 ‘노는 것’이 되는 자본주의의 논리는 장애여성의 모든 활동을 비롯한 많은 노동을 가치 없게 만든다. 이는 바로 비장애인남성의 기준으로 노동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가치를 매겼기 때문이다. 마치 ‘전업주부’들이 24시간 가사노동과 보살핌노동을 하면서도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집에서 놀아요”라고 대답해(할 수밖에 없어) 왔던 것과 같다. 그렇다면 장애여성의 기준으로 ‘노동’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돈을 벌지는 않더라도 많은 노력이 드는 일? 기존의 기준으로 가치가 높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일? 장애여성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할 때, 우리에게는 숨쉬는 것도 굉장히 애를 써야하는 활동이라는 것에 모두 공감하게 된다. 또 비장애인의 속도로 굴러가는 사회에서 같은 일을 하려고 하더라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장애인 노동권과 관련된 현실은 어떠한가. 장애인 노동권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국가나 기업의 장애인의무고용률을 유지하거나 늘리라고 하는 것이다. 또 기업이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장애인고용장려금을 국가가 줄이려고 하는 시도에도 반대하고 있다. 한편 직업이 없거나 (장애인을) 부양할 가족이 없는 장애인들은 ‘생계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정부보조금을 받는다. 이러한 생활보조금은 빈곤정책의 중요한 부분이고 보조금을 현실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장애인의 시각에서 노동을 재정의하고 사회기준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런데 한편으로 이러한 정책과 제도들은 기존 노동개념의 기준과 가치를 문제삼기보다는 기존의 노동시장에 장애인을 그대로 편입시키고 있다. 또는 기존의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장애인을 보조하는 기능만을 하고 있다. 노동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라고 했을 때 편입이나 보조의 형태가 아니라 평등한 시선으로 장애인의 노동 혹은 활동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혹은 장애인의 시각에서 노동을 정의하고 그것으로 사회의 기준을 바꿀 수는 없을까. 이런 건 단지 이론이나 구호에 머물 위험이 있는 고민이지만 내게는 장애여성운동으로서 전망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에서 나온 절박한 질문들이다. 과연 기존의 가치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장애에 맞는 조건을 만들고 그 안에서 노동을 하고 대가를 받을 수 있을까?

일본의 한 장애인을 위한 작업장에는 장애인의 상황에 맞게 손가락만을 움직임으로써도 작업을 할 수 있는 기계를 고안해서 장애인이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는다고 한다. 장애인이 자신의 특성에 맞게 노동할 수 있도록 시설을 마련했다는 사실에 우린 고무되었지만, 그러한 투자는 복지의 다른 형태일 뿐 기존의 노동구조를 바꾸거나 노동의 가치를 새로 쓴다는 의미를 갖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마음이 복잡해지고 고민이 생긴다. 노동운동이 주장하고 있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구호는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활동가’의 역할마저 비장애인 중심으로 정해져있는 것은 아닌지

기존의 노동공간에서 장애여성이 일할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신체장애를 가진 장애여성들에게는 자기 몸에 맞는 기계가 필요하다. 발로 치는 컴퓨터 혹은 말을 하면 글자로 인식하는 컴퓨터, 책을 자동으로 넘길 수 있는 기계, 자판을 치면 음성으로 변환되어 의사소통을 보조할 수 있는 휴대용 기계 등등. 이것은 내가 일하고 있는 장애여성 인권운동단체에서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다. 장애여성 단체 안에서도 장애여성이 일할 수 있는 조건은 여전히 열악하다. 또 대부분의 장애인단체에서 일하는 중증장애인들은 자신이 활동의 주체로 서기에는 실무가 너무 많고 사업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한다. ‘활동가’의 역할마저 비장애인 중심으로 정해져있는 것은 아닌지, ‘평등한 의사소통과 책임 분담’이라는 것이 장애인 활동가와 비장애인 활동가가 서로를 소외시키지 않고 어떻게 가능한 지를 고민하게 하는 지점이다. 물론 능력이 아니라 관계를 중심으로.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과 악조건 속에서도 어쨌든 우리는 노동하고 활동하고 있다.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노동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것이 경제적인 독립을 가능하게 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렇다면 장애여성의 입장에서 노동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아무도 ‘노동’, ‘활동’으로 부르지 않았던 아주 일상적인 활동에서부터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혼자 수행해 내는 것이 독립이 아니라, 어떻게 몸을 움직이고 이동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과 결정을 해나가는 것이 활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들어와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이런 고민들을 통해서 ‘독립’이 무슨 의미인지,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노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반추해보게 된다. 경쟁을 통해 성취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노동만 가치있는 노동은 아니라는 것을. 가정과 분리된 '공식'적인 공간에서 임금을 받는 노동 개념으로는 잡히지 않는 노동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장애인을 비롯해 여성과 비공식 부문에서 노동하는 많은 노동자들의 활동을 차별해온 기준이 되어왔다는 것을.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국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로서, 지역 주민으로서, 친구로서 서로 관계를 맺고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 서로를 소외시키지 않고, 서로의 가치를 재단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가능성을 만들어간다는 의미가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임

타리 님은 '다름으로 닮은 여성연대'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