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홍콩선언문은 초국적 자본과 강대국들의 승리이다. 애초에 WTO 사무국과 강대국들은 또 한 번 각료회의가 결렬됨으로써 정치적 치명타를 입는 것이 두려워 '낮은 수준에서의 합의'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즉, 홍콩각료회의를 '중간 점검' 정도로 사고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개도국들의 대표주자였던 브라질과 인도가 강대국들의 제안에 전격 합의를 해줌으로써 위기에 처한 WTO를 구출해냈고 예상보다 '높은 수준의 합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 동안 뜨거웠던 쟁점들이 많은 부분 정리된 샘이다. 먼저, 비농산물시장접근(NAMA)에서는 스위스공식을 도입하는 데 합의했다. 스위스공식은 관세가 높을수록 더 많이 인하해야 한다는 공식인데, 이는 상대적으로 관세가 높은 개도국들에게 상당히 불리한 공식이다. 개도국들은 그 동안 제조업 붕괴와 이에 따른 실업사태를 우려하면서 스위스공식을 반대해왔다.
서비스협상에서도 강대국들과 자본이 승리했다. 기존의 양자간 협상 방식을 대체할 수 있는 '복수간 접근방식'이 통과됨으로써 강대국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국가의 특정 서비스 사유화를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쟁점이 되었던 농업협상에서는 2013년까지 유럽연합과 미국의 수출보조금을 완전히 철폐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마치 개도국의 이해를 대폭 반영한 것처럼 보이나 개도국들의 요구였던 2010년보다 후퇴한 합의이며, 게다가 유럽연합과 미국은 이미 여러 가지 편법을 이용하여 자국 농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유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충분히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즉, 유럽연합과 미국 등 강대국들은 마치 농업협상에서 엄청난 양보를 하는 척 하면서 서비스와 NAMA 협상에서 개도국들의 양보를 이끌어냈는데, 농업 협상에서의 '양보'는 사실상의 '양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번 홍콩각료회의에서 개도국들은 강대국들의 속임수에 넘어갔고, 그 대가는 전세계 민중들이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합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앞서 말했다시피 브라질과 인도가 지난해 7월에 이어 다시 한 번 나머지 개도국들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18일 각료회의가 끝난 직후 기자회견을 하면서 "권력이 개도국 쪽으로 기울었다"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브라질이나 인도 모두 개도국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며, 민중을 대변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브라질 노동자당은 이미 국제통화기금(IMF)과 초국적 자본, 브라질 내 기업과 우익정치인들에게 굴복하면서 우경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인도의 연립정부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했으나 적극적인 '추진'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런 브라질 및 인도 내 계급지형의 변화가 이번 협상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어떻게 보면 예고된 결과라 할 수도 있다.
반WTO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편으로 홍콩에서 '쾌거'를 이룬 WTO는 세부원칙 협상을 제네바에서 계속 진행할 것이며, 2006년 말까지 협상을 완료한다는 기한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민중투쟁단 11명을 포함해 아직도 14명이 기소된 채 홍콩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6일 간의 홍콩 투쟁을 통해 홍콩시민들과 전세계 민중들, 국제 노동자·농민운동의 뜨거운 연대와 힘을 보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홍콩경찰의 인권유린, 폭력과 비상식적 기소, 그리고 WTO를 다시 살려낸 초국적 자본의 힘과 이에 조응하는 한국 정부 등 지배계급의 '국제연대'와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다. 이 가운데 살농 정책과 농민 살해, 비정규 법안 강행 처리 시도, 의료 및 교육 법인화·사유화 등 추운 겨울을 틈타 지배계급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강제하고 있다. 앞으로 국내외로 투쟁해야 할 사안이 그만큼 많지만, 동시에 이것이 위기에 처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마지막 발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덧붙임
전소희 님은 자유무역협정·WTO반대 국민행동 사무처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