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감수성의 대중적 확산을 목적으로 기획되었다는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 옴니버스 '인권영화' <다섯개의 시선>의 현란한 홍보용 전단지에는 인권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투자, 제작, 배급에 이르는 수직적 통합과 극장, 케이블, 인터넷을 망라한 채널의 독식을 통하여 충무로 영화계 안팎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CJ 엔터테인먼트사가 <다섯개의 시선>의 배급을 담당하고 있다. 영화의 제작, 배급 등을 둘러싼 물적 토대를 인권적으로 확보,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영화 컨텐츠의 진보성을 담보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마치 인권이 대중적으로 고루하고 우울한 화두로 인식되는 냥 이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기를 기피하면서 감독의 유명세를 앞세워 관객을 동원하려는 얄팍한 상술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 그리고 우리 이웃을 위하여' 제작되었다는 이 프로젝트의 진정성에 의문을 표하기 충분하다. 이는 <다섯개의 시선>에서 각 독립적인 에피소드를 관통할 인권 영역 내 구체적 주제가 없다는 공백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기획력의 부족, 인권교육의 절실함을 새삼 상기시키는 저급한 인권감수성에 기초한 영화가 옴니버스의 일부로 버젓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고마운 사람>(감독:장진)은 고문수사관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호명하는 도발을 저지른다. 영화는 물과 전기 고문이 횡행하던 가까운 한 시절, 악독한 고문수사가 벌어지던 폐쇄된 공간에서 강도 높은 노동시간과 부당한 임금 지급의 문제점을 호소하는 고문수사관과,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그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 수사대상자 학생간의 '교감'을 그렸다. 독재 정권 타도와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학생을 시대의 공기로부터 분리된 이로 희화화시키는 카메라의 시선이 말해주듯, 감독은 고문수사가 행해진 당시 정치사회적 배경을 철저히 외면한다. 또 현시대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절한 아픔으로부터 놀랍도록 자유롭다. 심신의 정수를 훼손시키는 직접적 폭력인 고문에 대한 성찰이 그 어디에도 없음은 물론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고문실의 벽걸이 시계는 금성(Goldstar) 마크가 선명히 찍혀있다. 인권영화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상황 설정을 뒤엎는 역할바꾸기를 통하여 무정치적인 재기발랄함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이 영화의 딱한 몸부림이, '이데올로기 속의 풍경'으로 영화를 사고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려는 일정한 흐름과 맥이 닿아 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다.
<남자니까 아시잖아요?>(감독:류승완)는 성차별, 동성애 혐오, 인종차별, 학력 차별, 서비스직 노동자 무시 등 온갖 반인권적 의식을 체득한,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근무하는 이성애자(라고 믿고 있는) 남성의 술주정을 통해 '남성'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비판하고자 시도한다. 감독은 동성애 커플, 이주노동자, 실업자 등이 자리한 포장마차에서 단 두컷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며 다양한 차별의 유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지만, 가해자의 눈에서 전개되는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친 동물성의 그것에 가깝다. 다소 작위적인 구성으로 현실의 고발에 머무른 점이 결정적으로 아쉽지만, 주변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남성 주인공의 행태가 시사하는 바는 유효하다.
<배낭을 멘 소년>(감독:정지우)은 자본주의적 사고가 지배하고 뿌리깊은 반공 정신이 작동하며 북한에 대한 피상적이고 왜곡된 인식이 주입되어 있는 남한 사회에서, 북이탈 청소년들이 겪는 차별과 소외감을 흑백의 명암과 인상적인 공간 활용으로 극화시켰다. 북이탈 주민으로의 존재감을 부정해야지만 버텨나갈 수 있는 남한 사회에서 그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자본주의의 가속도를 좀처럼 따라잡을 수 없는 그들의 외로운 질주는 죽음을 예비한 차디찬 기운을 남겨두고 까만 밤 오토바이 위에서 가능하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감독:박경희)의 돋보이는 미덕은 장애 여성의 시각과 속도, 감정의 흐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며, 그간 지극히 수동적인 대상으로 다뤄져왔던 여성장애아동의 파장으로 비장애인들을 인도한다는 데에 있다. 자신을 향한 쑥덕거림과 놀림 따위를 과감히 거부하고 스스로를 소중히 위하는 친구와 즐기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줄 아는 그녀의 너그러움과 현명함이 배인 대사. "어떤애가 있는 데요. 괜찮은 애거든요. 나쁜 애 아니거든요.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
<종로, 겨울>(감독:김동원)은 시린 배고픔과 추위에 절어 냉기어린 거리에서 사망한 중국동포 고 김원섭씨의 자취를 되밟으며, 막대한 임금 체불 등을 당하며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는 중국동포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전한다. 또한 어둑어둑한 생존의 갈림길에 내몰린 이들의 절박함을 외면하고 있는 현실에 경종을 울린다.
- 2977호
- 인권일반,인권, 영화를 만나다
- 이진영
- 2006-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