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의 직접행동이 불러일으키는 신선한 공기에 대한 박수도 뜨겁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금기에 도전하는 일은 ‘도덕적’ 비난에 직면하고, 마치 주술처럼 학교라는 소왕국의 신민들을 감싸고 있는 ‘우리 학교의 명예’라는 환상과도 대적해야 한다.
‘민주적 절차’ 제쳐두고 ‘집단행동’이 웬말이냐고?
학생들의 학내시위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집단행동’으로 규정되어 강제 해산과 징계의 위협 앞에 내몰린다. 대다수의 학교가 학생 선동이나 집단행동을 중징계 대상으로 규정한 교칙 조항을 갖고 있다.
지난 4월 두발자유와 체벌금지를 외치며 1차 학내시위를 열었던 양동중학교 학생들은 시위 강제해산에 이어 ‘주동자’ 징계 위협에 직면했다. 당시 학교 측은 인권단체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마지못해 징계 시도를 철회하면서도, “건의사항이 있으면 학생회를 통해 제안하면 되지 민주적 절차를 제쳐두고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입장을 강력 피력했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은 학생회 간부들이었다. 그러다 슬금슬금 두발단속은 다시 강화되기 시작했고, 7월 19일 계획했던 학생들의 2차 시위는 생활지도부 교사들의 원천 봉쇄로 무산되기에 이른다.
수원 청명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개학과 더불어 일방적으로 개악, 공포된 두발규정에 맞서 8월 25일 학생들은 1차 시위를 열었다. 야간자율학습 쉬는 시간을 틈타 열린 이 시위 역시 강제로 해산당했고, 운동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몇몇 학생은 주동자로 찍혀 자퇴서 작성까지 강요받았다. 29일 준비되고 있던 2차 시위는 대대적인 소지품 단속과 통행 제한, 퇴학 엄포 등을 통해 또다시 무산됐다.
‘집단행동’을 불온시하고 원천 봉쇄하고자 악을 쓰는 것은 두 학교에서만 볼 수 있는 예외적 사례가 아니다. 심지어 숱한 집단행동을 통해 교직원노조 합법화를 이루어냈으며 현재도 집단연가라는 집단행동을 하고 있는 전교조 조합원들 가운데서도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반가운 시선으로 보는 이들은 드물다. 학생들은 처벌의 두려움 없이, 자신들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하는 방식을 선택하여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더군다나 학교의 권력관계 하에서 상대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처지에서 소수의 학생이 학교를 비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학생회마저 학교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는 상태에서 학생회를 통해 의견을 건의해봤자 소용이 없을 때 학생들은 모여서 외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학생들의 ‘집단행동’의 자유는 학교의 억압에 맞서 자신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권리로서 사고되어야 한다.
학생들의 ‘집단행동’은 민주주의에 위배되고, 학생회를 통한 건의만이 민주적이라는 사고 역시 합리적 근거가 없다. 이는 민주주의를 절차적 민주주의로만 좁혀 생각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절차가 과연 민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애써 외면한다. 학생들의 집합적 행동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학생들이 모임으로써 어지러워질 거라고 간주되는 그 질서는 당연히 흔들어야 마땅할 ‘위장된 평화’, ‘반인권’의 질서다. 학생들이 나서 부당한 질서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있어야 하는 혼란이라면 기꺼이 거쳐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도 학교는 학생들의 집합적 저항을 폄하하기 위해 ‘외부단체 선동’이라는 딱지까지 가져다 붙인다. 학생들의 학내 시위를 지지하고 징계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어 달려가는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의 ‘연대’ 행동은 이렇게 ‘외부단체에 의한 불온한 선동’으로 왜곡된다. 오랜 억압으로 침묵과 체념의 문화에 길들여진 학생들이 또다시 침묵을 선택하고자 할 때 용기를 불어넣고 저항을 촉구하는 일이 선동이라면, 선동했다는 평가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 선동이라는 딱지가 학생들의 주체적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가리기 위한 베일로 작용한다면, 그 딱지야말로 불온하기 짝이 없는 ‘선동’이다.
왜 남의 학교에 와서 ‘지랄’이냐고?
학교는 외부의 비판과 직접행동이 학교 담장을 넘어 학생들에게 전해지는 것 또한 철저하게 불온시한다. 학생들의 학내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달려가면 “외부단체가 학생들을 선동한다”고 왜곡하고, 달려온 인권활동가들에게는 “외부인이 왜 남의 학교 일에 상관이냐”, “학교 앞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건 업무방해다”라는 경고가 돌아온다. 학교 안으로 밀고 들어가면 “사유지 침해”, “주거 침입”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이러한 반응들은 노동자들의 집회나 파업에 대해 걸핏하면 ‘업무방해’죄를 들이대는 기업의 횡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을 제지하는 이에게 ‘남의 가정사에 왜 감 놔라 배 놔라’냐며 눈을 부라리는 남성 가장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다. 아니 적어도 노동법상 ‘제3자 개입 금지’라는 악덕조항은 이미 사라졌고, 아내폭력과 아동폭력에 대한 개입은 법적으로 적극 권장된다.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어떤 조건에서 일하는가, 여성과 아동이 가족 내에서 안전하고 존엄하게 생활하는가의 문제가 한 기업 구성원, 한 가족 구성원들만의 문제가 아님이 사회의 보편적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견줘 지금의 학교를 둘러싼 인식은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다. 학교는 외부의 개입에 대해 여전히 철의 장벽을 세우고 있고 ‘사적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여기에는 공․사립의 구분도 없다.
안타깝게도 많은 전교조 교사들도, 심지어 학생들 가운데 일부도, ‘우리 학교’라는 환상의 공동체를 부여잡고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비밀에 부치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러면서도 그 공동체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고, 징계 위험을 딛고 변화를 촉구하며 일어선 구성원의 문제제기는 묵살해버린다. 심지어는 학생들 중에서도 “학교 명예 떨어지게 왜 학교 문제를 외부에 알리냐”며 동료를 탓하거나 “왜 우리 학교에 와서 그래? 너네 학교나 가”라면서 인권활동가들을 탓하는 이들이 있다. 이처럼 ‘우리 학교’라는 환상의 공동체 의식은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비밀에 부쳐서라도 ‘학교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주술을 작동시키고 공적 의제를 구성원 내부의 의제로 둔갑시키는 마력을 발휘한다. 이 환상을 깨지 않는 한, 이 주술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학교를 인권적으로 재구성하는 길은 더더욱 멀어진다.
규정은 규정이니 일단 지키라고?
학생들의 저항과 외부의 비판에 밀린 학교가 되받아치는 논리는 “규정은 규정이니까 바뀌기 전까지는 일단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질서에 대한 편집증에 사로잡힌 학교에는 불복종의 권리가 좀처럼 숨 쉬지 못한다. 2004년 학내 종교의 자유를 주장했다 퇴학처분을 당한 강의석 학생처럼, 그리고 올해 부당한 두발제한에 맞서다 특별교육이수라는 징계처분을 받은 동성고 오병헌 학생처럼, 부당한 규정을 따르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더 큰 징계가 돌아온다. 학생들의 인권 주장에 호의적인 교사들마저도 ‘너의 주장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바뀌기 전에는 따라야 하지 않겠니?’라며 구슬린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강의석은 단식으로, 오병헌은 머리를 자르지 않고 두발규정 불이행에 따른 징계에도 불복함으로써 학교의 부당함을 온몸으로 고발했다. 자신의 신념에도 충실하고 학교의 폭정에도 도전하는 불복종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사립학교의 횡포를 고발하다 파면당한 교사들이 부당한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출근투쟁을 전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교사의 집단행동은 안된다는 당국의 엄포에도 연가를 내는 교사들의 불복종과도 무엇이 다른가. 그럼에도 성인들의 불복종이 용기있는 저항으로 쉽게 인식되는 반면, 학생들의 불복종은 세상 물정 모르고 설치는 객기로, ‘꼴통같은 행동’으로 폄하당한다. 학생의 정당한 행동을 징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덕적 우위까지 챙겨가는, 이런 불공평은 세상에 없다.
교육3주체의 의견을 모두 반영해야 한다고?
규정이 바뀌기 전까지는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학교에 “그럼 언제 어떻게 바꿀 거냐”고 되물으면 이렇게 슬쩍 말을 돌린다. “교사, 학부모, 학생의 의견을 모두 들어본 후에 개정할지 여부도 결정하겠다!” 교육3주체론이라는 기만적 민주주의론이 또다시 등장하는 순간이다. 교칙 개정에 있어 교육3주체론은 학생인권의 무덤을 파는 함정이다. 학생들의 저항으로 교칙 개정에 착수한 학교마저도 학생, 학부모, 교사 의견을 동등한 비율로 반영한다. 물론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본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는 학교에 비해서는 훨씬 진일보한 것이지만.
교육3주체의 의견을 골고루 반영한다는 말은 얼핏 듣기에는 사뭇 민주적인 방식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는 구시대 프랑스의 앙시앵레짐 말기 특권의 유지를 위해 소집된 삼부회의 방식과 다를 바 없다. 학교 교칙을 통해 인권을 빼앗기는 이들은 학생인데, 학교의 억압을 유지하는 데 더 관심있는 교사와 학부모의 의견을 같은 비율로 반영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불평등이 아니다. 보나마나 상황 종료! 교육3주체의 의견을 반영하다 보면 늘 학생 다수의 의견보다 낮은 수위로 규정이 개정되기 마련이다. 여성 인권, 장애인 인권과 관련한 정책을 결정할 때, 그들의 억압을 경험하지 못한 남성과 비장애인의 의견을 동등한 비율로 반영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학생 인권을 제한하는 교칙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이다. 학생이 아닌 이들의 의견을 동등한 비율로 반영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장한 폭력이다.
학교라는 억압의 성역을 인권의 논리로 돌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학생인권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법체계, 책임 떠넘기기에 여념이 없는 교육당국도 문제지만, 억압적 학교를 떠받들고 있는 오랜 금기와 주술을 해체하는 일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나는 그러한 금기와 주술에서 자유로운가?” 우리 자신에게 질문이 필요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