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주> 1993년 출발해 2006년 2월 3천호를 끝으로 마감한 <인권하루소식>에 이어, 인권운동사랑방은 지난해 4월 26일 새로운 주간 인권소식지 <인권오름>을 창간했습니다. “가려진 인권현장, 민중들의 삶과 소통하는 인권매체, 어깨 힘 빼고 살아있는 고민을 전하는 매체”를 고민하며 창간한 <인권오름>이 이제 1년을 맞이했습니다. 1년 전 이맘 때, 모래바람에 점령당한 하늘처럼 흙빛으로 가리워졌던 우리 인권의 현주소는 지금도 여전히 어둡기만 합니다. 그 속에서 ‘갇힌 인권’의 경계를 넘어 억압받고 차별받는 이들의 입장에서 ‘다른 인권’을 이야기하겠다던 1년 전의 ‘포부’가 수줍게 떠오릅니다. 인권의 가치가 삶의 한가운데로 녹아들 수 있도록 삶살이 가까이, 나지막이 인권이야기를 전하겠다던 창간의 다짐을 다시 한번 되돌아봅니다. 여전히 헤쳐나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게만 보입니다. 이리저리 휘청이듯 중심을 잡은 듯 헤치면서 걸어온 1년, <인권오름>의 지난 1년을 <인권오름>과 함께 해준 독자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봅니다.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 ‘막내’기자인 나의 입사일은 2006년 4월 20일이다. 얼마 전 1주년을 맞은 <인권오름>과 비슷하게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셈이다. 이후 몇 달 간 <프레시안>에서 <인권오름> 연재를 담당하며 자주 이곳에 들락거리게 됐다. 하지만 내가 <인권오름>을 찾았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설렘’ 때문이었다.
나보다 먼저 기자생활을 시작한 <프레시안> 선배들은 늘 내게 말한다. “프레시안다운 기사를 고민해야 한다. 프레시안다운 기사를 쓰라”고. 1년이 지났지만 이 주문은 아직도 내게 가장 어려운 과제다. 대체 어떤 기사가 ‘프레시안다운’ 기사일까?
<인권오름>은 그같은 ‘매체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준다. 그건 사실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인권단체가 지닌 정체성일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권오름>의 정체성은, 마치 귀에다 대고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것과 같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다.
그래서 <인권오름>을 방문할 때마다 난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번 주에는 어떤 ‘적나라한 이야기’가 나와 있을까. 또 어떤 목소리가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까.
<인권오름>이 만난 이들의 목소리는 가끔은 거칠기도 하고 어떨 땐 이해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그만큼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준다는 점이 내가 생각하는 <인권오름>의 매력이기도 하다. 일반 언론의 눈에는 포착되지 않는 현장과 사람들을 발견하는 비결, 그들이 느끼는 고통의 원인을 풀어쓰는 예리함, 기자로서 배우고 싶은 점이다.
또 하나.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그 내용을 잘 드러내지 못하면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힘들다. 그러나 <인권오름>은 목소리를 살려내는 ‘재주’가 있다.
[삶_세상]과 [외침] 꼭지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가장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인 듯하다. [인권이야기], [쟁점수다], [벼리], [포비의 두리번두리번], [뒤척이다] 등 현안에 대한 전문가 및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이 표출되는 공간도 흥미롭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가는 코너는 청소년·아동인권 문제가 주로 담기는 [뛰어보자, 폴짝], [내 말 좀 들어봐], [인권교육, 날다] 등 <놀이터(교육섹션)>의 꼭지들이다. 좀처럼 알려지기 어려운 청소년·아동의 인권문제를 알린다는 점에서 가장 <인권오름>다운 코너라는 생각도 든다. 또 색다른 방법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는 [디카로 물구나무], [싱싱 고고], [와글와글 깔깔]도 언제나 기다려지는 코너다.
그간 우리 사회의 인권운동을 끊임없이 개척해온 사랑방의 모습처럼, <인권오름> 또한 앞으로 계속 꾸준히 그리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아갈 것이라 믿는다. 너무 서툰 고백 같기는 하지만, 내겐 지금 이대로의 <인권오름>이 충분히 매력적이다.
덧붙임
강이현님은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