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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_세상]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과 빈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기륭전자 노동자 오선숙 씨

기륭을 찾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을 향한 높은 담장이었다. 하늘을 닮은 푸른빛으로 색을 입혔지만 딱딱한 콘크리트 더미일 뿐인 담장은 너무나 차가워 보였다. 그 옆의 ‘투쟁 814일’이 문패처럼 걸려 있는 자그마한 컨테이너에서 우리를 반겨준 사람은 기륭전자 노동자 오선숙 씨. 인터뷰를 하러 간 우리를 보자마자 따뜻한 커피를 내어 놓았다. 그녀는 경찰들에게 맞은 허리가 성치 않아 천막 사수를 하며 컨테이너에서 쉬고 있었다. 목소리 또한 잠겨있어 걱정이 앞섰다. 성대 결절이란다. 그녀의 한과 설움이 목으로 터져 나와 상처를 입힌 것이리라.

노동자들이 기륭전자 정문 근처에 설치한 컨테이너.

▲ 노동자들이 기륭전자 정문 근처에 설치한 컨테이너.



투쟁. 814일의 길

2005년 2월, 파견노동자로 기륭에 입사한 선숙 씨는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불안했다. 잔업, 특근을 하지 않으면 해고 0순위에 올랐다. 몸이 고단해도 쉴 수 없었다. 매일매일 잘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시간들이었다.

“제가 원래 굉장히 낙천적인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두통이란 것을 모르고 살았는데 기륭 와서 두통이 생겼어요. 그만큼 불안하고 그랬던 거죠.”

노동절 바로 전날인 2005년 4월 30일에도 열심히 일했다. 잔업까지 마치고 회사를 나서는데 날아든 문자. “내일부터는 회사에 나오지 마시오.” 파견노동자를 해고하는 기륭의 방식이었다.

“문자 딱 받으니까 기가 막히더라고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어요. 노동절 전날 해고당했으니. 그 사람들이 노동절을 몰랐을 리 없잖아. 노동절의 의미가 이렇게 바뀌었구나, 실감했어요.”

선숙 씨는 해고 문자를 받고도 꿋꿋하게 출근했다.

“관리하는 사람들이 내가 계속 출근 하니까 귀신 보듯이 놀라더라고. 내가 출근 한 것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없거든. 공식적으로 해고 이유를 들어서 자른 것이 아니라 문자만 보낸 거니까. 제가 그런 이후로는 문자로 자르는 것을 못 했어요.” 그 때 결심했다고 한다. “끝까지 해서 뭔가를 보여줘야겠다. 그 바람 하나 때문에, 끝까지 가보자는 약속 때문에 지금까지 온 거죠.”

2005년 7월 5일 기륭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그 해 8월 24일에 파업을 시작했다. 곧 해결되리라 생각했던 투쟁은 2년을 훌쩍 넘겼다. 기륭 안에서만 멈춰 있던 투쟁은 이제 연대 활동으로 퍼져갔다.

“요즘은 단사 투쟁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아요. 연대 투쟁을 해야 해요. 사장들도 서로 뭉치는 것 같아요. 파업 지침서가 있는 것 같아요. 파업하면 ‘처음에 용역깡패 동원->담장 설치->CCTV 설치->구사대 조직->교섭 불참->손해배상 청구’ 이 매뉴얼대로 똑같이 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풍물패를 조직해 즐겁게 투쟁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들려주면 사업주도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꿈쩍도 안 해요. 그러니 함께 뭉쳐서 연대 투쟁을 해야죠.”

기륭전자 노동자 오선숙 씨.

▲ 기륭전자 노동자 오선숙 씨.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는 사측

“우리가 처음부터 기륭에 요구한 것은 한 가지였어요. 해고하지 말고 교섭해서 문제 풀어나가자. 단체 교섭 제대로 해서 이야기 하자. 그런데 노사가 합의해서 어떤 안을 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라인 두 개 줄테니 너희가 운영해라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것을 제시하니까.”

또 다른 파견노동자로 채워진 빈자리, 노동부의 방관으로 사측은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전혀 없다. 투쟁은 814일째로 접어들었지만 이 힘겨운 싸움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회사 쪽에서는 ‘정규직화 하라고 판정 나면 그렇게 하겠다. 그런데 아니지 않느냐. 벌금 내라고 하니까 벌금 냈다. 더 어쩌라는 거냐.’ 이런 식인 거죠. 2005년 이후에 사주가 3번 바뀌었어요. 올해 10월에 또 바뀌었는데, 회사 인수해서 이익이 좀 난다 싶으면 바로 팔아버리는 거예요. 이익 남기고 빠지고 이익 남기고 빠지고. 회사 소유주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어요.”

이러한 사측에 대응하는 기륭 노동자만의 방식이 있다.

“사장 인맥을 모두 찾아가서 압박을 했거든요. 이것을 못 견뎌서 이윤 남아도 팔아넘기는 것이에요. 기륭이 만드는 것이 GPS 이용한 라디오 DMB 제작 쪽인데, 이 기술을 갖고 있는 곳이 얼마 없대요. 그러니 이윤이 나는 거죠. 부가가치가 있고. 그래서 이윤만 내고 빠지는 거지. 제대로 된 사업주가 인수해서 문제 해결할 때까지 팔아치우게끔 투쟁하는 것이 전술이에요.”

컨테이너 내부.

▲ 컨테이너 내부.



투쟁의 장기화, 단절, 빈곤

투쟁이 장기화 되자 가장 힘든 것은 관계의 단절이었다. 그 단절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가족, 친구 관계가 끊겨요. 친구도 한 번 만나려면 차비가 들어야 되고, 만나서 밥도 먹어야 되고 돈이 들잖아요. 친구, 부모님 애경사에 가질 못해요. 전화나 문자 정도 보내는 것이 다죠. 뷔페 1인당 25000원 하는데 돈도 못 내면서 가는 것이 꺼려지잖아요. 그 쪽에서는 괜찮으니 오라고 하지만 찾아가는 것 자체를 자제하게 되요. 그러다 보니 관계가 단절되죠.”

친구, 친척 뿐 아니다. 처음에는 선숙 씨의 투쟁을 지지하던 가족들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그만큼 했으면 됐다. 가족들이 만류하죠. 애정이 있으니까. 또 내가 투쟁함으로써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으니까. 집안에서 경제적으로 이 정도 부분은 내가 책임지고 이런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너지니까. 가족 전체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되는 거죠. 투쟁기간이 길어지니까 힘들어 하더라고요.”

투쟁으로 더 이상 들어오는 돈은 없지만 나가는 돈은 많았다.

“저희가 지방까지 연대 활동을 다니잖아요. 정말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도 교통비나 식비로 한 달에 2~300만원은 든대요. 우리는 전국적으로 얼굴을 알아서 다른 지역에 가서 집회를 해도 우리한테만 벌금이 떨어져요. 이러한 비용들을 감당하는 것이 큰 괴로움이에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기륭 측이 투쟁하는 조합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사측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노조를 만들고 합법적 쟁의 절차를 밟는 사이 원청사용자인 기륭은 파견계약을 해지하고, 파견회사는 노동자들을 단체로 해고했다. 단숨에 불법 파업으로 변해버린 투쟁에 대해 기륭은 54억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동시에 대다수 인원이 해고 됐어요. 해고당했는데 나가서 싸우면 결국 아무것도 안 된다, 안에서 파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현장 점거 농성을 했죠. 원래 파업을 하려면 절차를 거쳐서 해야 되는데 절차 하나하나 거치려면 한 달은 걸리거든요. 그런데 당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어쩔 수 없었죠.”

그러나 이들의 현장 점거가 없었다면 기륭의 불법파견 행태는 묻힐 뻔했다.

“우리가 점거하며 파업하고 있는데도 기륭 쪽에서 라인에 간판을 가져다가 붙이는 거야, 간판 하나 달아 놓고 합법파견이라고 밀어 붙이려던 거죠. 그걸 우리가 카메라로 다 찍어서 노동부 사람 왔을 때 보여줬어요. 빼도 박도 못하게. 그렇지 않았으면 불법파견 인정 못 되었죠.”

다행히도 ‘불법 점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2007년 4월에 기각 되었다. 그러나 손해배상 청구로 가압류가 들어왔을 때 많은 조합원들이 투쟁을 그만두었다.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가압류가 들어오자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투쟁을 포기한 것이다. 처음 200명으로 시작했던 투쟁은 이제 40명의 조합원이 함께 하고 있다.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힘든 그들에게 지워지는 삶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재정 사업을 시작했다.

“재정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또 다른 동지들에게 괴로움을 주더라고요. 양말 5천 원짜리 떼어다가 만원에 파는 거니까. 또 조합원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재정사업이랑 투쟁사업을 병행할 수 없게 되었어요. ‘뚝딱이’라고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팔고 그랬는데, ‘뚝딱이’ 생기기 전에는 다른 기업 사내 식당에 가서 우리는 이런 이런 투쟁을 하는 기륭 노동자인데, 도와주십쇼 하는데 내가 진짜 ‘앵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투쟁에만 힘 쏟는 것도 벅차 지금은 재정 사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중 희미한 희망의 빛이 찾아왔다. 금속노조 측에서 장기 투쟁 중인 금속 노동자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해 주었던 것. “투쟁 처음보단 최근이 나았죠. 금속노조에서 생계비를 지원해 줬으니까. 그런데 원래 1년 지원 하겠다고 했잖아요. 그 1년이 끝났어요. 그래서 지금은 받고 있는 것이 없죠. 그래서 생계비 지원에 대해 금속노조 대의원대회에 안을 발의하고 있어요. ‘장기 투쟁 사업장 투쟁비 지원 계속 해라’고 주장하고 있죠.” 그들에게 희망의 빛이 지속되길 빌어본다.

컨테이너에 문패처럼 걸려 있는 '투쟁 814일'.

▲ 컨테이너에 문패처럼 걸려 있는 '투쟁 814일'.



끝나지 않는 투쟁

선숙 씨가 기륭에 들어온 것은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어린이집을 했어요. 아이들 14명 정도 많게는 17명 정도 되었나? 요즘 아이들 아토피도 심하고 그러니까 유기농 먹이고, 다른 데는 선생님을 한 분 쓰는데 한 분으로는 아이들을 세심하게 돌볼 수 없어서 세 분 두고 하니까 다달이 300만원 적자가 나더라고요. 4년 하다가 빚 갚으려 청산했죠. 그런데도 빚이 남아서 이 빚 갚으려고 기륭에 입사 했어요.” 빚 갚으려고 입사 한 것인데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선숙 씨. 이윤을 남기기보다는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 집을 운영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 모습의 반이라도 기륭의 사업주가 닮았더라면 814일의 장기 투쟁은 없었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그것으로 인한 빈곤. 그럼에도 그녀는 투쟁을 포기할 수 없다. “내가 옳았다고, 내가 정당하다고 그것을 알리고 싶어요. 그 한을 푸는 것이 투쟁의 목표예요.”

그런 그녀에게 절실하게 바라는 것 한 가지를 물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해요. 예전에는 이웃과 함께 하던 정서가 있었어요. 내가 힘들어도 나누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담장 없이, 허물없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 도울 수 있는 사회. 그러한 사회가 행복한 사회예요. 따뜻한 사회. 그것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작은 컨테이너의 문은 인터뷰 내내 열려있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문 닫고 있으면 우리만의 공간이 되지만, 문 열고 있으면 투쟁을 하고 있는 의미예요. 여기서 천막 사수 하는 것도 투쟁이거든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차가운 바람이 들이치는 컨테이너 안, 사람답게 살기 위한 투쟁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