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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죽음을 기억하라

손배·가압류는 죽지 않았다

[기획] 죽음을 기억하라 (2) 배달호·김주익

[편집인주] 모든 죽음은 산 자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지만 어떤 죽음은 산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이런 죽음은 죽은 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긴다. 생물학적 죽음을 수반하지는 않더라도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사회적 죽음도 있다. 죽음마다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을 부르는 한국사회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죽음이 계속되리라는 점이다. <인권오름>은 노무현 정권 시기인 2003년부터 최근까지의 죽음 가운데 점점 잊히고 있지만 산 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죽음을 기록함으로써 한국사회 인권의 현실을 점검한다.


87년 6월 항쟁, 곧이어 일어난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한 장이었던 마창공단 한복판에 ‘호루라기 사나이’ 금속노동자 배달호 동지가 서 있었다. 당시 30대 중반의 ‘철의 노동자’였던 그는 왜 사회가 이처럼 혼란에 빠져들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동료들이 후배들이 그냥 몰려가는 곳으로만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나 노동자 대중들의 함성을 들으면서 노동자, 사회, 정치라는 단어와 익숙해졌고 수동적인 자세에서 주체적인 자세로 변했다. 그 후 그는 노동조합 활동가가 되어 16년의 세월 동안 너무도 많은 것을 보고 느꼈던 것이다.

손배·가압류가 낳은 분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공공기업 민영화를 시작하면서 5조원의 총자산을 가지고 있던 한국중공업을 3057억원이라는 헐값으로 두산중공업에 팔아넘긴다. 두산중공업은 출발부터 노조무력화에 모든 역량을 투여했다. 2001년 1200여명, 2003년 1400여명 등 2년 동안 총 2600여명의 현장 노동자를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쫓아낸다. 또한 2001년 사측의 단체협약 위반에 반발해 파업에 참가한 조합원 18명을 해고하고 정직, 출근정지, 견책, 경고등으로 총 89명을 징계했다. 그뿐 아니라 61명을 고소·고발하고 89명의 조합원에게 총 65억원의 민사소송을 제기해 이들의 급여 및 부동산을 가압류했으며 심지어 아파트 보증금까지 차압하기에 이른다. 2002년에는 임단협 교섭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5월 일방적으로 임단협 해지 통보를 한 후 11월에 결국 임단협을 해지하고 만다.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노조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조합원에게는 잔업·특근·연장근로와 회사에서 주어지는 각종 혜택을 우선적으로 적용하는 반면, 노조활동에 적극적인 조합원들은 철저하게 감시하고 불이익을 줬다. 또 가족들을 상대로 회사에 대한 애착심을 가질 수 있도록 ‘주부한가족교육’, 회사를 알리는 ‘세미나’ 등을 개최해 남편과 자녀들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사측은 2002년 총 11억 5600여만원의 예산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노조탄압이 극에 달한 두산중공업에 쉰 살이 넘은 금속노동자 배달호 동지가 서 있었던 것이다.

2003년 1월 마산 삼각공원에서 개최된 '노동열사 고배달호동지 분신사망 추모및 살인 두산재벌 규탄6차 전국대회'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2003년 1월 마산 삼각공원에서 개최된 '노동열사 고배달호동지 분신사망 추모및 살인 두산재벌 규탄6차 전국대회'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하지만 2001년부터 두산중공업 현장은 무너지고 있었다. 2002년 민주노총 연대투쟁 지침이 지회에 내려졌지만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2002년 2월 26일 ‘노동법개악저지 및 공공3사 민영화반대’ 4시간 파업 지침이 하달되었으나 조합원 대오는 모이지 않았다. 결국 지회 투쟁지침에 따른 조합원들은 노조 간부와 열성 활동가들뿐이었는데 이들에게 회사는 징계로 맞섰다. 여기에 동참했던 배달호 동지는 고소·고발되어 정직 3개월에 부동산 가압류(10여명에게 5억 결정)를 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소·고발에 따른 재판에 계속 출두해야 했고, 현장 안 민주광장에서 천막을 치고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해고자를 바라봐야만 했다.

배달호 동지는 자신이 너무도 무력하다는 사실 앞에 자기 몸을 불살라 이들에게 희망을 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행을 앞두고 배달호 동지는 노조 사무실과 수배·해고자들이 생활하는 방을 자주 들렀다. 그날, 2003년 1월 9일 아침은 여느 날 보다 일찍 출근했다. 그리고 유서에 두산자본의 악랄함과 함께 “해고자들의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지고 가족은 어떻게 지내는지”라고 썼다. 글쟁이도 아닌 금속노동자가 그것도 쉰 살을 넘긴 늙은 노동자가 두산의 악랄함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노동자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배달호 동지는 두산중공업 사내 '노동자광장'에서 분신했다. 배달호 동지를 죽인 것은 바로 정권의 노동자 죽이기 손배·가압류와 두산 재벌의 노조말살 정책이었다.

노조탄압...파업...손배...가압류

김주익 동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2년 대한조선공사 훈련소(현 한진중공업 훈련소)를 수료한 후 대한조선공사 정식 사원이 되었다. 조선소 일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할 때쯤 훈련소 1년 선배인 김진숙 동지가 대의원으로서 어용 대의원대회의 실태를 조합원들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어용 노동조합과 회사가 한통속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주익 동지는 일 밖에 몰랐다. 하지만 1987년 7월 23일 부산 태광산업의 야간학교 여학생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시작된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25일 부산 영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로 이어지자 김주익 동지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눈을 떴고 민주노조 사수 투쟁에 자기 몸을 던지게 된다.

남한 최초의 조선소이자 91년 박창수 위원장이 전노협을 사수하기 위해 정권과 자본에게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한진중공업은 94년 최초로 선상을 점거해 한국 운동사에 길이 남을 엘엔지(LNG) 선상파업을 이끌어냈던 곳이기도 하다. 이때 노동조합 사무국장이었던 김주익 동지는 투쟁 이후 구속되고 회사로부터 강제휴직을 당했다. 끈질긴 투쟁으로 복직한 김주익 동지는 2000년 9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출마해 당당하게 당선되었다. 당선과 함께 곧바로 사측은 구조조정을 일방적으로 시행했다. 600여명의 조합원을 처음에는 명예퇴직의 이름으로 쫓아내려고 했으나 응하지 않자, 곧바로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조합원들이 회사에서 못 견디도록 만들었다. 평생 용접만 했던 조합원을 컴퓨터 엑셀 교육과 함께 회사가 권유하는 책을 집에서 읽고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강요했다. 대학생이나 할 수 있는 일을 정년퇴직을 3~4년 앞둔 노동자들에게 시키는 것은 자존심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위였다. 이를 견디다 못해 자진해서 사직서를 낸 조합원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김 지회장은 구조조정 대상자들을 모아 투쟁을 전개했다. 구조조정 투쟁은 특성상 전체 조합원들을 조직해 투쟁하기가 어렵다. 혹시 나도 구조조정 대상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몸을 사리기 때문이다.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는 회사는 마음대로 구조조정 칼날을 휘둘렀다.

2002년에는 아예 회사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02년 임단협이 타결되지 않은 채 2003년으로 넘어간다. 김 지회장이 다시 전면파업으로 맞서자 회사는 곧바로 노조 간부들에게 손배·가압류를 걸었고 노조 간부들이 살고 있는 집까지 압류해 가족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노조 간부 가족들은 가족대책위를 구성해 김 지회장과 함께 한진그룹 주주총회, 과천 노동부 청사, 서울 본사를 대상으로 상경투쟁을 전개하고 한진중공업의 노조탄압 실상을 알려냈다. 가족대책위 투쟁과 더불어 노조간부들은 현장에서 텐트를 치고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이에 금속노조에서는 한진중공업 지회 투쟁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연대투쟁을 결의하게 되고 부산역에서 집회를 한 후 한진중공업까지 행진하는 등 한진 자본을 압박했다. 사측은 금속노동자들을 막기 위해 정문 앞에 30톤자리 구조물을 설치하고 진입을 저지했다.

지프크레인 농성 당시 김주익 지회장 [출처] 금속노조

▲ 지프크레인 농성 당시 김주익 지회장 [출처] 금속노조



비오는 밤, 홀로 지프크레인에 오르다

이런 회사 측의 ‘막가파식’ 노무정책에 김 지회장은 마지막 결단을 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이 바로 3, 4도크 사이에 있는 100톤짜리 지프크레인 운전실(높이 34미터)을 점거한 고공투쟁이었다. 김 지회장은 지프크레인 점거계획 날짜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2003년 6월 11일 밤 11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홀로 85크레인 철제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갔다. 김 지회장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지회 간부들은 12일 아침에서야 지회장이 크레인 위로 올라간 것을 알고 곧바로 85크레인 밑 지회장 사수투쟁 전선을 형성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조합원들은 회사의 회유·협박에 못 이겨 작업을 하고 있었다. 김 지회장이 크레인 고공투쟁에 돌입하자 부산지방노동청장이 나서서 교섭을 주선했고 그 결과 7월 21일 회사와 노조는 잠정함의를 도출했다. 그런데 이를 회사 임원회의에서 거부하면서 합의는 뒤집어졌고 소식을 접한 조합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회사 측의 회유 협박을 벗어 던지고 하나 둘씩 크레인 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금속노조는 이 분노를 모아 현장 진입을 성공시켰다. 크레인에서 이를 지켜보던 김 지회장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기필코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회사 또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조합원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더 치밀한 계획을 수립한다. 직기장(팀장)을 동원해 조합원들을 출근 정지 시키면서 집에서 대기하는 조합원들에게는 급여의 70%를 지급하고 투쟁에 결합하는 조합원들에게는 지급하지 않았다.

투쟁 기간이 길어지면서 회사 측은 4도크에서 건조 중이던 선박 진수에 사활을 걸었다. 만약 선박 진수를 하지 못할 경우 선주가 계약을 파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관리자 500여명과 잠수부를 동원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선박 진수 작전을 강행했다. 조합원들이 똥물을 투척하고 크레인 위의 김 지회장은 볼트·너트를 투척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조합원들은 최후의 보루였던 선박이 진수되자 허탈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쟁대오에서 서서히 떠나갔다. 절망 그 자체였다. 김 지회장 또한 허탈감에 빠졌다. 태풍 ‘매미’의 강풍으로 크레인이 4바퀴나 돌아도 이겨냈던 김 지회장은 투쟁대오를 떠나는 조합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자기 목숨을 던지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고공농성 139일째를 맞은 2003년 10월 17일 김 지회장은 지프크레인 위에서 홀로 목을 맸다.

김주익 지회장은 추석을 이틀 앞둔 2003년 9월 9일과 10월 4일 각각 1통의 유서를 썼다. 사진은 10월 4일에 쓴 유서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김주익 지회장은 추석을 이틀 앞둔 2003년 9월 9일과 10월 4일 각각 1통의 유서를 썼다. 사진은 10월 4일에 쓴 유서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정권과 자본과 법은 한통속

배달호·김주익 동지는 무엇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던져야 했던가? 필자는 정권과 자본이 한통속이 되어 손배·가압류의 칼날로 두 동지를 죽였다고 단정한다. 손배·가압류는 노동3권이 보장되어 있다고 해도 이를 쓸 수 없도록 간부와 조합원들의 발목을 잡는다. 대부분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면 업무방해, 명예훼손 등 온갖 구실을 붙여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여기에 평등해야 할 법 또한 자본가의 편에 서서 ‘똥개’ 역할만 할 뿐이다. 배달호 동지가 유서에 “공정해야 할 사법부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쟁의행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불법이라니 가진자의 법이 아닌가”라고 썼듯이 자본과 사법부는 말 그대로 한통속이었다. 게다가 손배·가압류는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평범한 가정을 하루아침에 파괴하는 신종 범죄행위이다. 제주도 간호사들이 파업을 했을 때 보증인들의 밀감밭까지 가압류해 농사를 못 짓는 것을 보았다. 손배·가압류는 그동안 노동기본권을 침해했던 다른 어떤 수단보다 훨씬 강력하다.

김주익 열사투쟁에 사측은 완전히 백기를 들었다. 김진숙 동지를 제외하고는 해고자들이 모두 복직했고 전국에서 제일 좋다는 모범적 단체협약 요구안이 그대로 수용되었다. 파업을 이유로 회사가 손배·가압류를 할 수 없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이처럼 한진중공업은 승리했지만 열사들을 죽였던 사회적 과제인 손배·가압류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을 해결하는 힘은 노동자들의 단결뿐이다. 필자는 정규직 노동자로서 현장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자본이 갈라놓았는데 정규직 노동자들이 스스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차별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라는 자각이다.
덧붙임

◎ 박성호 님은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열사정신계승사업회 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