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것이 과자, 빵, 케이크, 빵 냄새라고 상상한다.
- 에디나, 12살, 사라예보지역
내가 만약 대통령이라면,
탱크들은 어린이들의 놀이집이 될 거예요.
캔디 상자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거예요.
박격포에선 풍선이 발사될 거예요.
총 구멍에서는 꽃들이 피어날 거예요.
- 로베르트, 10살
* 『나는 평화를 꿈꿔요-옛 유고슬라비아 어린이들의 눈에 비친 전쟁의 여러 모습』 (유니세프 엮음, 비룡소) 중에서 발췌
『나는 평화를 꿈꿔요』에는 전쟁을 겪은 어린이들의 글과 그림이 가득하다. 어린이들이 일상을 보내고 있는 집, 놀이터, 교회가 폭탄을 맞아 불에 타고 있거나 떨어져 나가 폐허가 된 모습이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그리고 있는 전쟁이란 집과 놀이터와 친구와 가족을 잃는다는 것이며, 언제 떨어질지 모를 폭탄 때문에 겁에 질려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일상에서 매일 똑같이 숨을 쉬며 살아 있으면서 한 손으로는 죽음을 만지는 공포를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 한국에서는 무기와 전쟁을 가르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세상 어딘가에 폭탄 대신 사탕, 풍선, 꽃이 떨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어린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대신, 전쟁과 무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는 국가 안보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지난 8월 부천시청 앞 잔디밭에 모형이 아닌 진짜 군용 헬기, 탱크 등의 무기가 전시된 일이 있다. 따뜻한 낮 시간을 이용해 6~7세의 어린이들이 이곳으로 체험학습을 나왔다. 어린이들은 헬기에 올라타고, 탱크 속을 들어가 보고, “총은 살기 위해 필요한 거란다” 하는 모순된 이야기를 줄줄이 서서 들으며 무기를 체험했다. 부천뿐 아니라 경기도 몇 군데에서 같은 행사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 경기도가 경기도청 운동장에 아파치 헬기를 전시해 민간에 공개한 것을 자랑스럽게 떠들더니, 이번엔 무기가 좀 더 ‘친숙하게’ 시민과 어린이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게다가 부천시가 나서서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공문을 보내 무기 체험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여 많은 어린이들이 이곳을 왔다.
무기를 놀이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전쟁은 평화’라고 하는 거짓 명제를 애써 학습시키려 하는 것일까. 그 안에 숨어 있는 죽음은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무기와 전쟁 속에 있는 고통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 전시 및 체험을 반대하는 시위를 진행하자 “도대체 이것을 왜 반대하냐”며 순진한 눈으로 묻던 군복 입은 어떤 사람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수십 명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무기 전시를 둘러보고 체험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것은 또 어떻게 볼 것인가.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거대한 전시관을 설립한 사회가 가진 상상력의 한계라고 보아야 할까.
전쟁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깃든 공포를 상상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됐다. 지난 3월 이라크 전쟁 8년이 된 날을 맞아 인권오름 기사에서 소개했던 ‘당신이 이라크인임을 아는 것은 이런 때입니다’라는 글은 전쟁이 만들어낸 일상 속 숨 막히는 공포를 공감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됐다. 무장집단이 급습할까봐 잠옷차림으로 지낼 수 없고, 외출을 해도 다시 귀가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고, 내일은 어찌될지 모르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만 붙잡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짤막한 글을 통해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고 있는 일상이 공포와 죽음의 감옥 속에 갇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공포가 내 것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글을 통해 우리 사회가 가진 뿌리 깊은 국가안보와 전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쟁이 만들어 낸 일상 속 공포에 대해 더 많이 듣고 공감하고 느낄 수 있어야겠다는 문제의식을 하나 얻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런 문제의식을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어린이책 몇 권을 만났다.
『우리 마을에 전쟁이 났어요』 (파티마 샤라페딘 글/클로드K뒤부아 그림, 맑은가람)
전쟁을 다룬 어린이책이 적지 않다. 『왜』는 글 없이 그림만으로 구성된 책인데, 두 존재가 서로 자기 이익만 고집하다 전쟁이 벌어져 모든 것이 무너지는 과정을 그렸다. 그 외에 『적』,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 등이 전쟁의 거짓된 실상을 들추고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를 담고 있는 책들이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전쟁 관련 책을 보면서 항상 의문이었다. 폭력이 이렇게 동등한 관계에서 벌어지는가. 권력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모순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아 아쉬운 점이 많았다. 또한 전쟁이 국가 권력의 문제가 아닌 개인 ‘선택’의 문제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한계도 있다.
전쟁을 그린 어린이책의 다른 한 쪽에는 어린이의 삶과 전쟁, 공포에 대해 다룬 책들이 있다. 『우리 마을에 전쟁이 났어요』는 그 중 하나다. 그림책은 한 소녀의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된다. 소녀는 학교 앞 거리에 서서 방긋 웃고 있고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처럼 바로 다음 장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장면이 그려진다. 군인이 마을을 점령하게 되면서 변해 버린 일상이 그 다음 장에 그려져 있다. 웃음은 사라지고 자유롭고 행복했던 일상이 방 안과 지하실에 갇힌다. 곧바로 일상이 회복되는 장면으로 넘어가지만 일상에 한 가지 새로운 감정이 덧붙여졌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공포심’이다. 수시로 전깃불이 나가고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공포가 일상에 공존한다. 그리고 다시 전쟁. 군인이 집까지 들이 닥치면서 숨어 있을 집조차 훼손된다. 이 책은 ‘일상 - 전쟁 - 공포에 갇힌 일상 - 일상의 회복 - 다시 전쟁 - 공포’가 교차 편집 되어 있어 그림책을 읽고 있는 어린이 일상과 전쟁의 공포가 섞이도록 했다. 전쟁이 누군가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 되는 감정을 함께 겪을 수 있다.
『바그다드에서 온 소녀와 이야기 양탄자』(안드레아 카리메 글, 고래이야기)
전쟁에 대한 공포는 전쟁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만 벌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바그다드에서 온 소녀와 이야기 양탄자』는 이라크 전쟁을 겪고 나서 독일에 건너와 살게 된 한 소녀 ‘누리’에 대한 이야기다. 누리는 전쟁을 떠나 왔지만 여전히 전쟁을 겪는다.
“그래도 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자꾸 사방을 살피게 되고, 자동차가 가까이 오면 멀찌감치 물러나게 돼요.”
“제가 밤에 자다가 어딘가에서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놀라 깨어났거든요. 총 쏘는 소리가 들리고 사이렌 소리도 들렸어요. 아빠 엄마는 제가 꿈을 꾼 것뿐이라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그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울고 있었어요. 오늘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가야 했어요. 엄마가 장 보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어요. 폭격에 부서진 집이 없다는 걸 보여 주겠다고요.”
강렬하고 잔인한 폭력은 오래도록 정신과 육체에 흔적을 남긴다. 누리는 전쟁을 떠나 있어도 전쟁을 겪고 있다. 폭력은 순간의 고통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끝없이 흔드는 어떤 것이다. 누리는 독일에서 생활하는 일상 속에서도 전쟁 속에 겪었던 감정을 잊을 수 없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안전한 곳이라는 믿음을 갖기가 힘들다.
“저는 독일이 무서워요. 어젯밤에는 하늘에 뭐가 날아가는 게 보였어요. 아주 밝게 빛나는 물체였어요. 그것 때문에 저는 밤새 잠을 잘 수 없었어요.”
게다가 독일의 학교생활 역시 쉽지 않다. 이주민에 대한 같은 반 학우의 편견은 전쟁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누리는 전쟁의 기억을 씻겨 내기 위한 듯, 편견으로 일그러진 고통을 뚫고 이겨내려는 듯 이야기를 상상하고 만들어 낸다.
『우리 마을에 전쟁이 났어요』, 『바그다드에서 온 소녀와 이야기 양탄자』 두 책 모두 전쟁의 아픔과 고통을 그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살아내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을 함께 그려낸다. 『우리 마을에 전쟁이 났어요』의 소녀는 폐허가 된 언덕 위에 앉아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꿔본다. 『바그다드에서 온 소녀와 이야기 양탄자』에서 누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무너진 육체와 정신을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정신적 노력으로 읽혀 희망적이다. 물론, 어른 작가가 어린이 독자에 대한 고려로 이야기의 마지막에 ‘희망’을 그려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마을에 …』에서 주인공 소녀가 선생님이 되어 적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가르치겠다는 다짐은 어쩐지 이야기의 맥락에서 한참 벗어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또 한 측면에서는 어린이가 단지 연약하게 앉아 쏟아지는 폭탄에 무력하게 놓여있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긍정적인 측면 또한 있다. “살고 싶다”는 것. 살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상상 속에 희망을 만들어 그것에 의지해 스스로 버텨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이제 열두 살밖에 안 되었어요.
우리 힘으로는 정치와 전쟁을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살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는 이 미친 짓을 멈추게 하고 싶어요.
오십 년 전의 안네 프랑크처럼 우리는 평화를 기다리고 있어요.
안네는 평화를 보지 못하고 죽었어요.
우리는 평화를 볼 수 있을까요?
- 제니카 지역 5학년 학생들 (『나는 평화를 꿈꿔요』 중에서)
덧붙임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