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동자동 쪽방촌에 들어와 산지도 이제 3년이 다 되어 간다. 2010년 5월 나는 나의 많은 짐들을 처분해 버렸다. 쪽방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살기 위해서는 방을 가득 채울만한 짐은 분명 나에게 ‘짐’이 되었다. 책들도 지인들에게 거의 대부분을 맡기고 부피만 차지할 것 같은 짐들은 다 처분해 버렸다. 그리고 친한 형에게 부탁해 자동차로 금세 날라버린 짐꾸러미를 들고 쪽방으로 이사를 왔었다.
내가 들어간 쪽방건물은 처음부터 쪽방으로 쓰기 위해 만든 듯하며 50년 정도 된 낡은 건물로 4층 자리 건물에 4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나의 방은 건물 3층 중간 방. (물세, 전기세를 포함한) 보증금 없이 월세 16만원. 공동화장실, 공동세면장. 공동우편함. 취사공간 도 없다. 짐을 한쪽으로 놓고 나면 한 사람 누울 공간이 남는다.
이삿짐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천정의 오래된 벽지를 쳐다보고 쪽방을 누워 보았다. 그리고 처음 느낀 생각은 ‘관’에 누운 듯한 감정이 들었고 그날 저녁 쪽방에서 불을 끄고 누웠을 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묘한 기분. 쪽방주민들에게 쪽방에서의 첫날밤이 어떠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한 여성주민은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서럽고 슬펐다고 한다. 반면 노숙을 오래했던 주민은 ‘나만의 새로운 공간이 생겨서, 자유롭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겨서 너무나 행복했다’고 한다. 낯설다는 것이 주는 이런 복잡한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익숙함이 된다.
현재 나에게 동자동 쪽방촌은 너무나 잘 맞는 옷처럼 익숙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익숙해지면 질문이 사라진다. 질문들의 답을 알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답을 몰라도 질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 쪽방지역에 살며 낯설음으로 던졌던 질문들을 되짚어 보고 다시 질문해 본다.
집이 아닌 방에서 산다는 것?
쪽방에 살면서 처음 들었던 고민은 ‘방’에 대한 것이다. 쪽방은 ‘집’이라고 부르기보다 다들 ‘방’이라고 부른다. 집이 아닌 방. 신발을 벗고 바로 방문을 연다. 그러면 나의 작은 방이 있다. 집에는 거실도 필요할 것 같고 부엌도 필요할 것 같고 화장실도 ... 하지만 쪽방에는 그냥 덩그러니 방 하나만 있다. 쪽방은 누우면 침실이고 밥을 먹으면 부엌이고 TV를 켜면 거실이 된다.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익숙해지지만)
그리고 앞서 말했듯 방의 크기는 내가 가질 수 있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의 양, 크기, 종류 더욱이 가구 수까지 결정하게 된다. 방의 크기에 맞게 짐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고 내 몸을 맞출 수밖에 없다. 또한 혼자 누우면 딱 맞은 공간에 혹시 누군가랑 같이 사는 건 더욱 힘든 일이며 그래서 사람들을 초대하기조차 꺼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결국 나의 공간, 나의 물건이라는 건 내가 살아가는 방식, 생활 전반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텐데, 특히 방 크기가 내 삶의 크기, 내 마음의 크기가 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겨울에 온수를 틀지 않는 이유는?
쪽방에서의 더운 여름, 한증막 같은 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잠을 잤다. 당연히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샤워를 하고 자고 또 샤워하고 자는 힘든 여름을 겪으며 이것이 ‘쪽방생활’이구나 하며 힘들게 여름을 지냈다. 그리고 찾아온 겨울. 여름은 양반이었다. 겨울 추위는 진정한 쪽방생활의 어려움이었다. 방은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난방이 되었는데 방안의 공기는 너무 차가워 밖에서 노숙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머리까지 이불을 다 덮고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쑤셔오고 건조한 방으로 인해 목이 따갑다. 그리고 씻으러 간 공동세면장은 온수시설도 전혀 없어 얼음처럼 찬 물에 몇 번 세수하고 나니 겨울철 씻는 횟수가 자연스레 적어지고 씻을 때는 커피포트에 물을 끊여 씻게 되었다. 월세에 전기세, 물세가 다 포함되기 때문에 아마도 집주인은 좀 더 따뜻한 주거환경을 만드는 것이 결국 자신들의 비용을 증가시킨다고 보고 있나보다. ‘얼마든지 들어올 사람은 많으니. 여기 살기 싫으면 나가라’는 배짱 장사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이 되면 노숙도 힘들어 쪽방, 고시원은 거의 포화상태가 되며 쪽방 수에 비해 방을 구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또한 집주인들은 이를 활용하여 겨울에 방세를 올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쪽방주거 환경의 열악함은 우리 사회가 모르는 바가 아니다. 이미 많은 언론을 통해 알려졌으며 이에 지자체는 간헐적으로 주거개선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주거개선사업이 쪽방주민에게 이득이 돌아가는 것은 매우 적고, 집주인이 쪽방방세를 올릴 빌미를 제공하여 쪽방주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실정이다.
가족, 사회와의 단절이란 무엇일까?
나는 명절이 아니면 거의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 4~5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 가족을 만날 수 있는데 여간 결심을 하지 않고는 가능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1년에 2, 3번 만나는 가족이지만 나는 그들을 ‘가족’이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친밀하게 만나지 못해도 가족이 있다와 없다는 큰 차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몇 십 년 동안 가족과 만나지 못하는 상황. 혹은 가족들에게 연락하면 ‘더 이상 연락도 하지마라’는 통보를 받는 상황이 어떤 느낌일지 정확하게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냥 너무나 가슴이 먹먹하고 홀로 있는 외딴섬 같은 감정일거라는 생각정도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쪽방주민들이 이렇게 1인 가구로 살아가는 데에는 가족단절이나 사회적 단절의 경험이 크다는 것을 주민들을 만나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주민들 중에 몇 분이 고향을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해서 동자동사랑방에서 두 번 정도 고향을 함께 찾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 일명 ‘쪽방주민 고향 찾아주기’. 옛 기억을 지도삼아 찾아가는 고향. 많이 변해버린 고향이라 길을 헤매기도 한다며 그 주민은 함께 고향에 가준 동자동사랑방에게 무척이나 고마워해 하던 기억이 난다.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도 아닌데 어릴 때 떠나온 고향.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듯 묘한 그리움으로 종종 살아가시는 주민들을 만나면 우리에게 고향은 뭐고 가족은 뭘까? 그리고 왜 이분들은 가족을, 고향을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가지 못 하는가?라는 생각. 그리고 그 가족과의 단절, 사회와의 단절로 인해 생기는 공백이 어떻게 채워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면 더욱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다.
쪽방이 던지는 무수한 질문들
쪽방은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하루 종일 그 질문 속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쪽방주민의 90%는 왜 남성인가? 쪽방주민의 미혼율은 왜 이렇게 높은가? 왜 이렇게 1인 가구가 많은가? 과연 예전부터 이렇게 1인 가구가 많았을까? 라는 질문에서부터 쪽방 김씨 할아버지는 왜 매일 동네의 같은 자리에 앉아 하루를 보낼까? 왜 박씨 형은 몸이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을까? 술을 끊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는 이씨 형은 왜 매일 술을 먹게 되는 것일까? 이런 무수한 질문들은 결국 내가 다른 이를 이해하려는 과정, 사랑하려는 과정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런 질문들이 나를 곤혹스럽게 우울한 감정으로 치닫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질문을 멈출 수는 없다.
서울에서 이미 달동네는 다 사라졌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달동네가 사라진 이후로 우리 눈에 가난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몇몇 공간에서는 가난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눈에 보인다. 가난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이 쪽방에서 나는 오늘도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 질문들을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풀어나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덧붙임
슈아 님은 동자동사랑방 사무국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