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직장인들은 다들 못 그만둬서 회사 다닌다고 합니다. 일이 힘들고 즐겁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대가라고 주어지는 임금조차 생계를 꾸리기에 벅차지만 별 도리가 없다고 합니다. 남의 돈 받는 게 원래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직장인, 아니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기 위해 권리와 존엄을 거래하거나 포기하면서 일하는 현실, 임금은 원래 사장이 주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임금관계에 물음을 던져보았습니다. 임금에 대한 우리의 권리, 임금을 인권으로 재구성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자 합니다. 4회에 걸쳐 나눠 싣습니다.
1985년 4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들은 10일 동안 파업을 벌이며 임금인상 투쟁을 벌였다. 재벌기업 대공장 남성노동자 최초의 집단행동으로 기록된 이 싸움은 2년 뒤 울산에서 일어날 사건의 전조였다.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기는커녕 사측과 협력하는 어용노조, 노동자를 머슴이나 종 취급하는 관리자들, 거듭된 흑자에도 제자리 걸음인 임금 속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군필자 처우문제(호봉, 연차휴가 불인정, 작업량 과다 할당)를 계기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84년 8월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은 이듬해 임금투쟁에서 놀라운 단결력을 과시하며 김우중이 어용노조 집행부가 아닌 노동자 대표와 직접 협상을 하도록 만들었다.
과거 조합원들은 임금인상 교섭이 진행되는 과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잘 주면 좋고 적게주면 불평으로 그쳤던 것이 조합원들의 태도였다. 그러나 이번 임금인상 만큼은 “내가 아니면 누가 받아 주겠는가. 임금은 누구는 더 주고 누구는 적게 주는 것이냐”며 너도 나도 내 것을 찾겠다는 일념에 공청회에 참석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까지는 회사나 집행부로부터 철저히 기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거기에 항거하여 이렇다하게 커다란 단결력을 과시해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 차체부 조합원 투고글, 근로자의 함성 10호, 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투쟁기록(1985)
‘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정리된 이 기록은 84년 8월부터 시작된 대우차 노조민주화 투쟁기록이자 노동자 조직화 기록이기도 하다. 당시 배포되었던 유인물, 진정서, 신문과 같은 1차 자료가 주는 느낌은 ‘노동자들의 말문이 트였다’는 것이다.
사장이 그걸 몰라서가 아니다. 우리를 일단 무식하다고 단정하고 그런 공갈 협박을 하면 먹혀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으로 노동자를 무시하는 사고방식 때문인 것이다.
승용차부 의장부 직장이 똑같은 소리를 해댔다. ‘니가 애 낳는 거 아니니까 잔말말고 일하고 저녁때 가봐도 충분하잖아.’ 이것이 근거없는 소리라면 그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할 수도 있다.
- 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투쟁기록(1985)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리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기보다는 ‘시키는 대로 일만하고 주는 대로 받는 인간기계’ 취급받던 노동자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당당한 주체로 인정받고자 하는 투쟁을 시작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인 임금지급관행과 작업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사측의 태도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85년에 대우차 노동자들도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저임금을 해결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투쟁을 했지만, 정작 그들을 분노케 하고 움직인 것은 노동자들을 임금교섭의 주체로 대하기는커녕 근로기준법조차 어기는 사측의 태도였다. 18.7% 임금인상, 사무직과 생산직 사원에 대한 차별폐지(서울 통근버스), 노동자 대표를 단체교섭위원으로, 군필자 처우 개선, 월차휴가 사용자유 쟁취, 통상임금으로 가산임금을 계산하라는 요구들은 ‘노동자를 존엄하고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라’는 한 가지 요구로 요약될 수 있다. 대우차 노동자들이 볼 때, 위의 요구들은 경영상의 어려움 때문에 시행할 수 없는 문제라기보다는 노동자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종이나 머슴 취급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추측컨대 18.7% 임금인상안도 인상률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상의 근거는 최저생계비 부족분, 생계비 상승률 보상분, 생산성향상분에 대한 공정분배였다. 그런데 최저생계비 부족분은 회사 측 사정을 고려해 1/5만 요구한 것이었고, 생산성향상분은 회사가 자료를 주지 않아 흑자를 기록했다는 사실에 기초해 대충 때려 맞춰 넣은 것이었다. 노조민주화를 추진했던 이들은 이렇게 27% 인상안을 산출하고 16.3%를 제안했던 노조 집행부와 협상하면서 18.7%로 조정한다. 조합원들을 철저히 소외시켰던 어용노조와 2.4%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85년도 대우차 노동자들의 18.7% 임금인상 요구안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인상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회사 측에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요구하고, 각 부서별 순회 공청회를 진행하며 임금에 대한 노동자들의 주장을 모아나가는 과정을 겪어가면서 만든 요구안이었다. 이런 노동자들의 요구를 회사는 진지하게 경청하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선출한 대표가 단체교섭위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주는 대로 받지 않겠다는 것,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감각과 액수를 맞춰보는 과정, 회사는 노동자들을 임금협상의 주체로 진지하게 대하면서 적절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게 당시 대우차 노동자 생각이었을 것이다. ‘교섭과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잘 주면 좋고 적게 주면 불평하는 조합원’의 모습은 임금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노동자를 동등하고 존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본으로부터 임금에 대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노동자의 모습이다.
주는 대로 받지 않겠다,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겠다
노동자 투쟁역사에서 임금에 대한 권리는 임금인상 요구 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1960년대 내내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 전신) 노동조합은 사무직과 생산직의 급여를 동일한 날에 월급으로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생산직은 한 달에 두 번 순급으로 지불받던 관행이 있었는데 노동자들은 이를 육체노동에 대한 차별로 생각했다. 또한 당시에는 일반적이지 않았던 상세한 급여 내역을 달라는 요구도 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임금이 어떻게 계산되어 나오는지 알아야 한다는 인식에서였다. 이는 임금액에 대한 관심 외에도 임금의 권리주체로서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이 대폭적인 임금인상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 노사관계 철폐를 요구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복장과 두발단속 폐지, 강제적인 아침체조 중단, 식사의 질 개선 등이 포함된 수많은 요구들이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터져 나왔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요구가 임금인상이라는 경제적 요구와 그리 다른 요구들일까? 당시 노동자들의 요구와 투쟁들을 항목별로 분류해 투쟁의 성격을 분석파악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이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함께 외치고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대폭적인 임금인상은 정치적 요구가 아닌가? 노동자에게 임금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만큼 보장되어야 하는 경제적 요소이지만, ‘임금인상 요구’는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던 노동자들이 이젠 주는 대로 받지 않겠다는 정치적인 행위이자 권리선언이다. 두발단속, 아침체조, 반장의 욕설과 폭력에 대한 저항은?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행위이자 권리선언이다.
사는 게 너무 팍팍하고 임금이 조금이라도 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장이 결정하는 문제라고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한 임금인상 투쟁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임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핵심이라는 것을. 그래서 임금은 사장이 결정하는 것이다. 저임금은 그 결과일 뿐이다. 과거 노동자 투쟁은 임금인상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이 바로 그 지점에 균열을 내면서 투쟁을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부 여당도 보수언론도 이제는 저임금이 심각한 문제라고 말하는 세상이다. 그들도 저임금 노동자들의 처지의 비참함 묘사에 한 소절 보태면서 민주노총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보라고 한다. 임금인상 투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본이 모든 걸 틀어쥐고 있는 작업장의 전제적 권력관계를 정조준 하는, 임금에 대한 노동자 권리의 자각과 조직화가 필요하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임금관계와 저임금을 부당한 대우, 잘못된 처사, 권리의 훼손으로 충분히 인식할만한 수많은 경험을 이미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