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였다. 한 인권단체가 올해부터 활동비를 최저임금 기준에 맞추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 얼마야?” 몇 년 전부터 최저임금을 외우고 다녔다. 한 나라의 대통령 이름보다 중요한 상식이라고 생각하며 외웠다. 그런데 정작 한 달 일하고 받아야 하는 돈이 얼마인지는 미처 몰랐다. “주 40시간 기준으로 116만 6,620원인데, 우리는 117만 원을 받기로 했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 속으로 되뇌었다. 117만 원, 117만 원, 117만 원…….
시급과 월급 사이
6월 29일 최저임금위원회 제8차 전원회의가, 사용자위원 9명 전원 불참으로 무산됐다. 경영계는 최저임금을 고시할 때 월급을 병기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최저임금 결정시한을 앞둔 마지막 회의 불참 사유로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시급 곱하기 노동시간’이 월급일 것이고, 곱하기는 계산기를 두드리면 될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시급을 외우는 나 역시 곱하기를 할 수 없었다. 계산기는 월급을 알려주지 않는다.
일주일에 40시간을 일했다 치자. 그러면 한 달에 몇 시간을 일한 것일까? 노동시간을 매일같이 계산해뒀다가 곱하기를 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 않는다 하더라도 이게 끝이 아니다. 모든 노동자에게는 유급 휴일의 권리가 있다. 한국의 근로기준법 역시 주 15시간 이상 일한 사람에게는 유급휴일을 보장한다. 주 40시간을 일하면 주 48시간 어치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흔히 월급을 계산할 때 ‘48시간×4.34주=209시간’을 기준으로 삼는다. (올해 민주노총 최저임금 요구안이 ‘209’만 원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이 역시 끝이 아니다. 209시간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8시간을,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다. 날마다 주마다 출퇴근 시간이 달라지는 사람들, 법정 노동시간보다 연장해서 또는 야간이나 휴일에 일하는 사람들은 “통상임금의 50%를 가산”해야 하니 더 복잡해진다. 이 모든 걸 다 따져볼 수 있는 노동자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계산기가 어떻게 월급을 알려주겠나. 오직 통장에 들어온 급여액수를 보고 월급을 확인할 뿐. 시급과 월급 사이에도 착취의 비밀은 숨어 있다.
경영계의 생떼
유엔 사회권 규약 제7조는 공정한 임금, 품위 있는 생활을 보장하는 보수를 인권의 내용으로 밝히고 있다. 최근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제7조의 내용을 해설하는 일반논평을 토론 중이다. 공정한 임금은 노동이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임금이다. ‘노동자가 직면하는 특정한 어려움’,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미치는 영향’ 등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차별을 겪는 여성노동자의 지위를 고려해야 하고, 고용계약의 불안정을 완화해야 공정성이 확립된다. ‘품위 있는 생활을 보장하는 보수’는 “생활비와 기타 지배적인 경제·사회적인 환경과 같은 외부 요건들을 토대로 결정되어야” 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 3월 중소기업 429개 업체를 대상으로 「최저임금 인상 영향에 대한 중소기업 의견조사」를 실시했다. 경영계는 “명목상 최저임금액은 월 116만 원이지만, 실제 중소기업이 지급해야 하는 인건비 부담은 월 160만 원을 상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사정이 이러니 최저임금 인상이 부담스럽다고 생떼를 쓰는 것이다. 경영계의 입장에서 월급은 ‘인건비’일 뿐이니, 한 달 116만 원만 주면 되는데 160만 원이나 주는 게 얼마나 억울하겠나.
인권의 기준으로 보면 전혀 다르다. 제한된 노동시간보다 더 많이 일할 때 시급을 가산해 받는 것은 인권이다. 그만큼 노동자는 자신의 건강과 안전, 삶의 기회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밤에 일하거나 휴일에 일할 때 더욱 많이 받는 것 역시 권리다. 물론 한국의 노동법도 이것을 보장하고 있다. 그래서 160만 원은 최저임금을 훨씬 웃도는 것으로 보이지만, 보나마나 최저임금에 아슬아슬하게 맞춘 수준일 것이다. 일을 더 시켰으니 더 주는 게 당연하더라도, 경영계는 따지고 싶을 것이다. 고용은 사람을 사는 것이고, 월급 주면 한 달 일 시키는 것은 자유 아니냐고. 그들에게는, 최저임금이 너무 낮아서 사장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 한 달에 겨우 160만 원을 버는 노동자들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경영계가 우려하는 혼란의 정체
최저임금 심의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경영계는 ‘산업현장의 심각한 혼란’을 우려했다. 시급으로 결정된 최저임금을 기반으로 산업현장에서 인사․노무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관행을 무시하고 제도를 변경한다면 큰 혼란이 올 것이라는 입장이다. 심지어 전원 불참할 정도로 강경하다. 그만큼 시급과 월급 사이에서 갈고닦아온 기술이 위대한가 보다. 월급을 병기하는 것만으로도 일대 혼란을 일으킬 정도라면 말이다.
그럴 만도 하다. 법은 시급과 노동시간을 먼저 정하지만, 저임금 노동시장의 현실은 다르다. 사장이 월급을 정하면 노동시간이 정해진다. 임금은 법에 따라 계산되지 않고 법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에서 설계된다. 최저임금 미만 노동자 비율이 십여 년 동안 오르락내리락 하면서도 10%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법의 예외를 활용한 경우도 있고, 법의 빈틈을 노린 경우도 있고, 과감한 법 위반도 있다. 법을 위반한들 노동자들은 알기 어렵고, 위반 사실을 안들 항의하기 어렵다. 어떤 경우든, 노동자 열 명 중 한 명은 받아야 할 만큼의 돈도 못 받고 있다.
임금과 노동시간을 통제하는 그들의 기술은 권력의 본질이다. 경영계가 반발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기술의 혼란기에 닥칠 수 있는 권력의 흔들림. 대부분의 저임금 노동자들은 임금명세를 궁금해 할 겨를도 없이 주어진 월급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나처럼 곱하기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이, 계산기 없이 한달 받아야 할 최저임금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된다면? 경영계는 그저 임금 수준의 높고 낮음에 긴장하는 것이 아니다. 더 주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주는 대로 받던 노동자들이 더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경영계의 두려움은 본능적이다.
인상보다 두려운 것은 권리
올해는 최저임금 인상 주장에 탄력이 붙었다. 소득 증대가 경기 침체로부터 회복하기 위한 열쇠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3월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최저임금 인상을 주장하고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까지 환영하는 입장을 밝혔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가 기업까지 걱정하는 오지랖을 요구받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영세기업을 궁지로 몰아가는 대기업과 불공정한 하청구조 등에까지 시야를 넓히면 더욱 좋을 듯하다. 사내유보금을 쌓아둔 대기업의 곳간을 여는 상상은 더욱 설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임금 인상의 전제조건도 아니며 목표도 아니다. 임금은 더도 덜도 말고 우선 인권이다.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다. 돈 벌려고만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돈 못 벌면서 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벌고 싶은 만큼 벌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싸운다. 그러나 임금인상투쟁은 단순히 돈 더 달라는 싸움은 아니다. 노동자들은 감각적으로 안다. 문제는 임금의 액수가 아니라, 임금을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라는 것을. 힘이 없으면 오르는 듯 보였던 월급도 금세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임금의 수준은 권리의 전부가 아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을 위협한다. 월급으로 고시된 최저임금과 자신의 월급을 비교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궁금해 하기 시작할 것이다. 남들보다 훨씬 더 일하는데 뭔가 덜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저임금 수준으로 주면서 밤이나 휴일에 이렇게 일 시켜도 되는 건가? 따져보고 나서 결국 건질 게 없더라도 이미 달라진다. 법의 기준일 때와 노동자의 질문일 때, 권리는 전혀 다른 힘을 지닌다.
노동자의 질문을 만들어야
2014년 기준 최저임금 미만 근로자의 87.6%는 30인 미만 사업장에 근무한다. 그리고 30인 미만 사업장의 조직률은 1%도 안 된다. 저임금 노동자 중 대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조직을 만들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사회권규약 제7조의 일반논평 초안이 “노동조합 결성과 결사 파업에 대한 권리는 공정하고 유리한 근로조건 도입․유지․옹호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수단”임을 강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조직이 없으면 통장에 찍히는 월급 액수는 푸념거리나 방향 없는 분노로 흩어질 뿐이다. 검찰이 민주노총 위원장에 대해 집요하게 체포영장을 청구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흩어지면 사라지니까.
노동자의 질문을 만들어야 한다. 최저임금이 얼마야? 이것은 노동자의 질문이 아니다. 주는 대로 받아야 해? 이것이야말로 노동자의 질문이 되어야 한다. 경영계가 이유 있는 반발을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박이 아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 최저임금 인상을 위해 필요한 것은 계산기가 아니라 주소록과 연락처다. 모여서 이야기하자. 질문을 만들자. 임금의 수준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에 대해 토론하자. 그리고 함께 싸워야 한다. 그때 우리는 209만 원을 외울 수 있지 않을까?
인권으로 읽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