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올해 4월, 교육부가 내놓은 ‘학교 성교육 표준안’이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배제한 것이나 보수적인 성별 관념을 담고 있는 것이 지적되며 논란이 불거졌다. 그러나 교육부가 올해 내놓은 성교육 표준안이 ‘특별히’ 후퇴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동안 학교에서 이루어져 온 성교육은 애초부터 수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재를 통해 당사자인 청소년들이 자신이 경험한 학교 성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청소년들의 삶의 현실을 바탕으로, 현재 학교 성교육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제안한다.
나는 2008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때 첫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에는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청소년들이 ‘이성’에게 갖는다는 성적 호기심, 사람들이 ‘이성’과 경험한다는 성적 긴장을 여자친구들에게 느끼고 있었다.
제도교육에서 내가 ‘성애’나 ‘사랑’에 대해 공식적으로 배운 것은 모두 이성애에 대한 것이었다. 딱 한 번 동성애에 관한 언급이 교과서에 등장했었다. HIV에이즈에 대한 설명으로 ‘동성애자에게서 처음 발견되었다’는 언급이었다. 그 외에는 없었다. 성교육 시간에도, 가정 교과서에서도, 사람이 동성에게 성애적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이야기된 적은 없었다. 나와 같은 사람의 존재나 감정은 어쨌든 제도교육이라는 공적 공간에서는 삭제되는 무엇이었다. (내가 제도교육에서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교과서에는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일부 학교, 일부 학생만이 선택하는 과목이기에 한계가 있지만, 긍정적인 변화이다.)
그때로부터 7년이 지난 올해, 교육부는 ‘학교 성교육 표준안’을 내며 성교육의 질 향상을 목표한다고 발화했다. 하지만 표준안의 내용은 7년 전 성교육의 수준과 비슷하거나 더 보수적이고 더 구렸다. 대표적으로 이성애가 아닌 성적 지향, 시스젠더가 아닌 성별정체성에 대한 내용이 초․중․고 과정 전체를 통틀어서 거의 부재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3월에 발표한 성교육 표준안의 연수 자료에는 성소수자나 다양한 성적 지향에 대한 지도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내용마저 있었다. 이 내용은 교육부가 최종적으로 발표한 표준안에서는 삭제되었다.
기존의 성교육도 그랬지만, 표준안에 따른 성교육 프로그램도 모든 학생이 이성애자 시스젠더라는 확신을 전제로 만들어진 듯하다. 이성 커플의 데이트 그림, 결혼 그림, 아기 그림을 제시하면서 ‘사랑하는 이성이 생긴다면 함께 하고 싶은 것을 세 가지씩 적어보라’는 요구에 동성애자인 학생들은 어떻게 응수해야 할까? 차별하는 사회 때문에 삶에서 그러해왔듯 성교육 시간에도 이성애자인 척을 해야 할 것인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교육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각 차시의 제목들에서도 알 수 있듯 표준안에 따른 성교육이 알려주는 것은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것뿐이다. 동성 연인과 교제를 하고 있거나, 동성과 연애하기를 희망하는 학생은 연애에 대해 어디서 배워야 할까? 표준안에 따른 성교육 자료들을 보면 ‘이성 교제’에서 중요한 것은 남녀가 다르며 이 차이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성교육 표준안은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답습하면서 남녀의 차이를 말한다). 연애란 곧 이성 교제며, 이성 교제의 갈등은 연애에 참여하는 구성원이 다른 성별이라는 데서 기인한다고 말하는 성교육에서, 동성 간 연애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안은 응용을 해도 알 수가 없다. 성소수자인 학생들이 살면서 경험하는 차별 문제나 그 차별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이런 성교육은 이성애자가 아닌 학생들에게는 쓸모가 없다(사실 성교육 표준안은 성별 고정관념을 답습하는 데다 청소년의 성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어 이성애자인 학생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성교육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한다).
단순히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넘어, 성교육 표준안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고 성소수자인 학생들이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인식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중학교 과정으로 제시된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 자료를 보면,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성전환 수술에 대한 생각 등)과 동성 친구에게 감정을 느끼는(설레는 감정, 스킨십 욕구) 비율이 중학생보다 고등학생에게 적게 나타났다며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또한 성정체성 확립을 자신의 출생 시 부여된 성별을 수용하는 것으로 서술하면서 건강한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안정적으로 정체감을 발달시킨다며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시스젠더가 아닌 성정체성을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낙인찍는다. 성소수자를 낙인찍는 성교육을 받으며 성소수자인 학생들은 무척이나 괴로울 것이지만, 교사-학생 간의 위계관계, 이성애 중심적인 학교 분위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당사자인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교육을 강제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폭력이 아니면 무엇일까.
내 삶에 도움이 되었던 연애, 성, 섹스에 대한 지식이나 태도 중 제도교육에서 배웠던 것은 하나도 없다. 특히 성교육에서 배웠던 것은 더더욱 없다. 제도교육 바깥의, 넘쳐나는 연애 기술서적이나 실용 지식들도 이성애 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이어서 도움이 되었던 것이 없었다. 내게 도움이 됐던 자료는 이성애 각본의 허구를 무너뜨리고 여성의 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발화하는 페미니즘 서적과 글들이었다. 그 외에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랑에 대해 다룬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만이 도움이 되었다(그러나 그 책에도 성소수자 차별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는 모든 학생에게 보장되어야 한다. 좋은 교육은 일차적으로 당사자 학생의 삶에 도움이 되는 교육이어야 하고, 또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 여기서 좋은 사회란 ‘어른들 보시기에’, 권력을 가진 세력의 관점에서 좋은 사회가 아니라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들과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좋은 사회를 의미한다. 성소수자인 학생이 여느 학교, 학급에나 일정 비율 존재함에도 성소수자를 위한,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지 않는 것은 명백히 부조리한 상황이다.
교육학자 아이스너는 특정 이념이나 문화 세력에 의해 제도교육에서 의도적으로 특정 지식, 가치, 행동양식을 배제하여 지워 버린, 그래서 학생들이 배우지 못하고 놓치게 되는 부분을 ‘영(0) 교육과정’이라고 개념화했다. 성소수자의 존재와 다양한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은 이렇게 의도적으로 배제된, 그러나 평등과 인권의 관점에서 꼭 시행되어야 할 교육과정이다.
덧붙임
쥬리 님은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