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빛, 동방의 순수한 우리 백의민족을 에이즈로써 파탄국가를 만들어 불치의 병인 에이즈의 온상이 되어 학생들은 두려움과 공포의 장인 학교를 다니게 될 것입니다.” 2011. 12. 19.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서, 이덕영 교육의원.
HIV/AIDS* 인권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활동가로서, 동시에 한 명의 레즈비언으로서, 가장 답답하고 고민스러운 순간은 성소수자를 공격하는 도구로 HIV/AIDS를 마주할 때다. 대형 보수 교회를 비롯한 보수 단체들이 앵무새같이 반복하는 말들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편견과 낙인들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지,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가 머릿속에서 빙빙 돈다. “동성애→항문섹스→에이즈→죽음”이라는 도식은 너무나 단순명쾌한데, 제대로 이 관계를 풀어내기 위해 필요한 언어는 왜 이렇게 길기만 한지. 활동을 시작한 이후,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는 레즈비언인데 요즘 내 머릿속에는 항문섹스랑 에이즈 밖에 없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성적지향과 HIV/AIDS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내게 커다란 숙제다.
공격의 도구가 된 에이즈를 바라보며
일주일간의 서울시 의원회관 점거농성 기간 동안, ‘에이즈’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저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농성장에서 마주한 보수단체 사람들의 발언으로, 그들의 피켓에 적힌 섬뜩한 붉은 글자로, 급기야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하는 시의원의 연설까지. 농성 중 ‘에이즈’라는 단어를 듣거나 보지 않고 지나간 날은 드물었다.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다. 성소수자를 공격하고, 비난할 때, 언제나 제일 앞에 등장하는 건 “현대의 흑사병”, “게이 돌림병”인 에이즈였으니까. 마침내 본회의 장에서 “동방의 빛, 동방의 순수한 백의민족”을 에이즈가 파탄 낼 것이라는 이덕영 교육의원의 연설이 울려 퍼졌을 때, 나는 쓴 웃음과 함께 앞으로 갈 길의 험난함에 대해 생각했다. 비과학적인 편견과 오해에 둘러싸인 이 질병은 학생인권조례 이후에도 반차별 입법 운동 과정에서 끊임없이 공격의 도구로 등장하게 될 터였다.
‘저들’이 성적지향과 HIV/AIDS를 관련짓는 건, 성적지향과 HIV/AIDS 사이에 과학적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HIV/AIDS 발견 직후의 역사적 맥락이 담겨있다. 80년대 초반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커뮤니티에서 HIV/AIDS가 처음 발견된 이후 미국의 보수 정부와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은 이를 동성애자의 질병으로 낙인찍으며 성소수자를 배제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악용했다. HIV/AIDS에 대한 공포로 사회를 통제하고, 보수적인 성규범을 강화하기에 매우 유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성소수자, HIV/AIDS 감염인, 성소수자인 HIV/AIDS 감염인 모두를 주변화 시키는 반 인권적인 논리는 참으로 간단명료한 덕에 쉽게 전파되어 나갔다. HIV/AIDS에 대한 과학적 사실들이 규명된 지금까지도 이에 기인한 성소수자와 감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에이즈는 동성애자의 질병이 아니다?
HIV/AIDS는 성적지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에이즈는 동성애자의 질병이 아니다’라고 쉽게 선을 긋고 밀어낼 수는 없다. LGBT(엘지비티,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섹슈얼) 커뮤니티가, 성소수자 운동이 에이즈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성소수자가 에이즈로 공격받기 때문만이 아니다. 성소수자인 HIV/AIDS 감염인이 우리와 함께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MSM(Men who have sex with men;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남자)과 트랜스젠더는 HIV 취약계층**에 포함된다. 더불어 마약사용에 의한 감염비율이 극히 낮고, 여성 감염인의 수가 적은 한국의 상황에서 많은 HIV/AIDS 감염인들은 게이나 바이섹슈얼의 정체성을 가진 남성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가 비가시화 된 존재이듯, 이들은 사회는 물론 LGBT 커뮤니티에서 조차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HIV/AIDS와 성소수자를 완전히 분리하려는 언술은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눈앞의 공격을 당면할 때, 이 점을 유념하며 되받아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포함된 학생인권 조례안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트위터에는 눈에 밟히는 글이 참 많았다. ‘에이즈는 동성애자의 질병이 아니다’라는 내용부터, ‘에이즈 걸리는 게 문제면 여자들은 다 레즈비언이 되면 안전하겠다’며 보수단체와 시의원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비꼬는 내용까지.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반대하고 학생인권조례를 지지하는 이들의 글이었다. HIV/AIDS 인권운동을 고민하는 관점에서, 호모포비아를 넘어서기 위해 에이즈와 경계를 치고 에이즈포비아의 문제는 그대로 남겨두는 상황을 지켜보는 마음은 복잡했다. 그렇다고 에이즈포비아와 호모포비아에 동시에 대항할 수 있는 분명한 언어가 내 안에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지난 1월 3일 나누리+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평을 냈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의 조속한 시행을 촉구하며, - 서울시의회 의원들의 에이즈포비아에 우려를 표한다’라는 제목의 글은 내가 나누리+에 들어와서, 나누리+의 이름으로 처음 쓴 글이다. 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바로 이 HIV/AIDS와 성적지향의 관계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지만, 단체의 이름으로 내는 논평이라는 무게감 때문에 에둘러 간 측면이 없지 않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함께 하는 활동가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최근 청소년 감염인 커뮤니티를 만들고 활동하는 친구와 동성애자이자 감염인 활동가인 가브리엘은 밤늦은 시간 전화로도 여러 번 괴롭혔다. 그러나 여전히 ‘고민이 진행 중인’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보니, 이 숙제는 나만의 것이 아닌 HIV/AIDS 운동의 한 의제로 계속 가져가야 할 과제인 것 같다.
또 다른 과제, 학생인권조례의 시행과 에이즈 편견 없애기
에이즈 인권활동가들이 늘 반복해야 하는 말들이 있다. “HIV는 감염원인과 감염경로가 명확하며, 감염확률이 다른 감염성 질병에 비해 높지 않다. HIV는 일상생활을 통해 공기 중으로 전파되지 않는다. 90년대 중반, 칵테일 요법이 개발된 이후 HIV/AIDS는 당뇨나 고혈압과 같은 만성질병이 되었으며,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는 HIV/AIDS 감염인은 건강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문제는 질병이 아니라 질병을 이유로 한 차별이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 HIV/AIDS 이슈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겨울 정도로 당연한 내용이지만 HIV/AIDS에 대한 편견과 낙인이 뿌리 깊은 한국사회에서 이 말은 여러 번 반복해도 사람들의 귀에 가닿기 어렵다.
그러나 사실 HIV/AIDS와 관련한 차별과 낙인을 제거할 의무는 국가에게 있으며, 유엔 아동권리 위원회의 지속적인 권고사항이기도 하다. 유엔 아동권리 위원회는 일반논평 4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의 맥락에서 청소년의 건강과 발달”은 “18세 이하의 모든 사람이 협약상의 모든 권리를 차별받지 않고 누릴 것(아동권리협약 제2조)을 보장할 의무”를 당사국이 지닌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또한 “이러한 근거는 청소년의 성적지향과 건강상태(HIV/AIDS와 정신보건상태를 포함)를 포함”한다고 밝혔다. 또한 일반논평 3 “HIV/AIDS와 아동의 권리”에서는 “차별은 HIV/AIDS에 영향을 받거나 혹은 HIV에 감염된 아동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HIV/AIDS에 대한 아동의 취약성 증가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성적지향”에 근거한 차별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그리고 지난 12월 19일 통과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2조 6항은 이 조례의 “학생인권”의 정의에 아동권리협약에서 인정한 권리가 당연히 포함됨을 규정하고 있다.
중․고등학교의 성교육 시간에 HIV/AIDS는 빠지지 않는 주제다. 그러나 학교의 성교육에서 가르치는 건 “HIV/AIDS는 성관계에 의해 전염될 수 있는 무서운 질병”이라는 사실 뿐이다. 학교라는 공적인 교육공간에서 편견을 강화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는 학생인권조례에 명시된 차별금지 사유인 ‘병력’에 의한 차별이기도 하다. 학생인권조례 시행의 한 측면은 모든 차별금지사유를 고려한 평등한 교육이다. 특히, 제정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성적지향과 성정체성’, ‘임신과 출산’처럼 성과 관련한 이슈에서 학생인권의 보장은, 이들에 대한 편견이 없으며 이들 사유를 고려한 올바른 성교육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HIV/AIDS라는 ‘병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전달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는 에이즈 인권운동의 입장에서 ‘HIV/AIDS에 대한 차별과 낙인의 제거’라는 국가의 의무를 교육당국에 보다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에이즈가 공격의 도구가 되지 않을 그날
이 글을 쓰는 지금,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서울시 교육청의 재의 요구는 확실시 되었다. 학생인권조례를 어떻게 잘 시행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할 교육청이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통과된 조례를 흔들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 보장의 역사에는 거스를 수 없는 방향이라는 것이 있으며, 결국 어떤 지난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는 통과되고 시행될 것이다. 나는 지금 비관 없이, 조례의 시행이 어떻게 하면 에이즈포비아를 없애는 교육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하려 한다. 학교에서 이러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언젠가는 에이즈 인권활동가들이 같은 이야기를 입 아프게 반복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좀 덜어질 날이 오지 않을까? 에이즈를 도구로 한 공격이 힘을 잃게 될 그날이 어서 오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 HIV(에취아이브이)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로, HIV 감염인은 HIV에 감염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AIDS는 후천성 면역결핍 증후군으로, HIV에 의해 면역력이 약화되어 여러 증상이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AIDS환자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HIV 감염인과 AIDS 환자는 구분해야 하지만, 사회적 의미가 분리될 수만은 없으므로 본문에서는 ‘HIV/AIDS’로 병기합니다.
** HIV 취약계층(HIV Key affected populations) ; 취약계층이라는 것이 높은 HIV 유병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HIV-에 대한 편견과 낙인을 포함해서-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 집단을 의미한다. 이들 뿐만 아니라, 청소년, 여성, 이주민, 성노동자 등 전반적인 인권 상황이 취약한 집단이 이에 포함된다. 질병이 사회적 안전망과 인권의 보장 수준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덧붙임
호림 님은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