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할머니를 생각한다. 할머니는 10년간 고향을 떠나 손주를 키워내고, 스스로 쓰임을 다했다는 듯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원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셨다. 할머니의 요양원행은 마치 스스로 품위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 선택’처럼 보였다. 작년 명절, 면회를 마친 나는 할머니가 탄 휠체어를 요양원 로비에 모인 할머니들 무리에 밀어두고 도망치듯 요양원을 빠져나왔다. 로비에는 스무 명 남짓한 할머니들이 천장 가까이 달린 조그마한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그날 이후 나는 종종 생각했다. 할머니는 그때 그 TV 프로를 좋아하셨을까.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보고 싶은 TV 프로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지난 12월 10일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하 탈시설지원법)이 발의됐다. 나는 다시 장기요양시설에 거주하는, 리모컨을 쥐지 못하는 나의 할머니가 떠올랐다.
좋은 거주시설은 없다
탈시설지원법은 장애인이 거주시설 등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에서 자립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법안은 탈시설의 개념을 정의하고 탈시설 지원에 대한 국가의 의무와 책임을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거주시설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를 조사하여 제재하는데 그치지 않고 향후 10년 내에 모든 장애인거주시설을 폐쇄한다는 사회 변혁적인 포부도 담겨 있다.
오랜 기간 탈시설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싸워온 진보적 장애운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법안이다. 2007년 석암재단 시설비리 척결 요구를 계기로 탈시설 운동이 본격화된 전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설에서 인권 침해와 비리·횡령 등 비민주적 운영이 드러났다. 역설적으로 시설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시설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를 매개로만 사회에 존재를 드러냈다. 그 결과 많은 대중도 이제 얼추 ‘문제 있는 시설이 많다’는 공통된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그런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코로나19로 인한 누적 사망자 중 37.4%가 정신장애인이었다는 압도적인 숫자를 확인할 때, 한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해 처음 사망한 분이 20년 동안 시설에 지내다 고작 40킬로그램의 몸무게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 바로 그 시설에서 95%가 넘는 사람이 감염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 전반적인 시설 운영에 분명 문제가 있다는 건 누구든 직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개 거주시설에 대한 관심은 ‘시설을 어떻게 더 잘 운영할지’의 문제로만 좁혀지고, ‘탈시설’에 대한 논의까지 확장되지는 않았다. 탈시설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줄곧 “나쁜 시설을 좋은 시설로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 중 비자발적 입소 비율이 70%에 이른다는 통계, 시설에 거주하면 취침·식사·목욕·외출·친교·취미 활동 같은 모든 일상생활을 철저히 통제받게 되는 현실, 이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권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듯 거주시설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구체적 인권침해 사건과 무관하게 이미 구조적으로 권리를 침해하는 공간이다. ‘좋은 거주시설’이 아니라 ‘탈시설’을 지향하는 탈시설지원법이 필요한 이유이다.
장애인 거주시설을 유지해온 조건
그렇다면 과연 시설거주 장애인이 지역사회에 나와 살 수 있을까. 이들은 실상 지역사회가 함께 살기를 거부한 끝에 시설에 입소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적 생산-착취 시스템에서 (재)생산할 수 있는 몸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며, 그렇지 않은 존재는 사회의 짐 내지는 비용으로 간주된다. 그런 사회에서 장애인은 자본이 착취할 수 없는 ‘무능한’ 몸을 가진 존재다. 시설은 그런 장애인을 ‘보호’라는 이름아래 사회로부터 배제시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설은 장애인과 같이 살기를 거부한 차별적인 사회의 연장선이자 결과물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7년 실시한 ‘중증·정신장애인 시설생활인에 대한 실태조사’결과에 따르면, 장애인거주시설과 정신요양시설의 입소 기간은 10년 이상이 각각 58%와 65%를 차지했다. 자신의 의사가 아닌 국가와 가족에 의해 입소해, 10년에서 많게는 20년, 심지어 사망에 이를 때까지 사는 경우도 흔하다.
이러한 현실이 유지되어온 데 정부의 책임이 크다. 역대 정부 처음으로 탈시설 정책 수립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재인 정부의 2021년 장애인 자립생활지원 예산은 2% 증액에 그친 반면, 장애인거주시설 예산은 10%가량 늘었다. 지방자치단체의 탈시설 지원 정책은 자체적인 조례에 근거한 체험홈·자립주택 전환주거 제공, 탈시설 정착금 등이 있지만, 국가 차원의 제대로 된 지원 체계가 전무한 상황에서 지원 규모는 시·도별로 제각각이다. 2019년 7월부터 탈시설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장애등급제 폐지가 단계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시설 정책에는 사실상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러한 조건에서 여전히 장애인 거주시설은 위기에 처한 재가 장애인에게 제공되는 유일한 주거정책으로 자리 잡게 된다. 현 정부가 탈시설을 공약으로 내걸면서도, 정작 ‘시설이 사라진 사회’를 만드는 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온 결과다.
탈시설과 함께 변화해야 할 사회
시설거주 장애인이 지역사회로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장애인이 기댈 자리를 만들지 않아서다. 예컨대 시설 거주인이 보호작업장에서 단순노동을 할 수 있을지언정, 자본주의 논리로 이윤과 생산성을 판단할 때 지역사회로 복귀한 장애인이 머무를 만한 자리는 없다. 탈시설 이후에도 기존 사회가 노동할 몸을 직업재활가능한 사람과 가능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하고 복지수혜대상을 선정할 때, 탈시설 장애인은 이웃과 평등한 동료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어렵다. 따라서 주류 세계가 ‘정상’이라 정의해온 것들을 재정의하는 과정, 다양한 조건에 있는 장애인의 활동 그 자체를 가치 있게 평가하고 인정하는 변화를 만드는 과정이 탈시설의 기본전제여야 한다.
누구나 호의적인 사회적 제도와 다양한 사회서비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존중받는 가운데 상호 의존할 수 있는 관계망이 있어야 자립이 가능하다. 이는 인간사회의 지극히 기본적인 원리다. 장애인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탈시설은 단순히 장애인의 삶의 변화만을 담보하지 않는다. 기존 사회가 중요하게 여겨온 질서와 가치에 저항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배제와 분리를 통해 체계적으로 박탈해온 공적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것을 동반해야만 한다. 이 법의 발의와 제정 과정은 불평등한 세상 질서 속에서 차별당해 온 모든 이들의 삶의 모습의 변화와 맞물려야 한다.
시설이 사라진 자리에 채워야 할 것
생의 마지막을 품위 있게 지켜내고 싶었던 할머니에게 노인요양시설이 유일한 선택지였다는 점에서 할머니의 선택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 곳에서 할머니의 품위가 지켜지지 않았던 건 그곳에는 할머니와 의미 있게 관계를 맺고, 할머니의 삶을 존중하는 관계를 맺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탈시설은 그저 시설에 거주하던 사람을 지역사회로 옮기는 일에 그칠 수 없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지원과 환경적인 조건을 갖출 때, 그리고 그 속에서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을 때, 시설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다양한 삶의 조건을 직접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탈시설이 가능해진다.
탈시설지원법은 향후 10년 모든 거주시설의 폐지를 이야기 한다. 시설이 폐지된 자리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에 대한 답은 분명해 보인다. 그간 눈에 보이지 않고 격리되어온 시설 거주인들의 자리를 만드는 일이 곧 사회의 몫이 될 것이다. 그 시작점이 될 탈시설지원법의 제정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