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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차별의 구조에 맞서는 도전, 평등을 향한 연대

“차별금지법도 그렇지 않아요?” 지난 주 사랑방도 함께하고 있는 ‘다른 세계로 길을 내는 활동가 모임’(길내는모임)의 전체회의 뒷풀이 때입니다. 한 동료활동가가 ‘계속 같은 의제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는 지겨움’을 토로하며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 할 말도 없어요….” 물론 저도 우는 소리를 했지만, 반쯤은 농담이고요(^^) 아마 활동가로서 반복의 지겨움보다 더 힘든 조건은 ‘지겹다’고 말하는 사회적 여론 혹은 현실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는데 (너무 오랜 지연 탓에) 사람들이 뻔한 이슈로 ‘지겹다’고 느끼지는 않을까 하는 스스로의 우려가 아닐까 싶습니다.

활동 의제가 늘 새롭고 짜릿할 수는 없지만 실제 그런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이 계속 해 왔던 이야기들이 특정한 당사자 혹은 사건의 가시화를 통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할 때, 혼자만의 고민인가 싶었던 질문들이 다른 운동 및 다른 동료활동가들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공동의 해석을 만들어낼 때, 논의가 미진하거나 새로운 쟁점을 중요한 의제로 제기하고 부각시키는 활동을 기획할 때…. 대체로 반복되는 이야기들 속에서도 활동가로서 배움과 즐거움을 함께 느낄 때인데요. 올해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정책담론팀에서 함께 기획한 연속토론회 <차별의 구조에 맞서는 도전, 평등을 향한 연대>도 바로 그 순간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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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여성신문

 

구조적 차별 '있다 vs 없다'의 논쟁을 넘어, 도전하는 운동을 잇자

지난 3월부터 4월까지 궂은 날씨에도 5회차 연속토론회에 30~40명의 사람들이 꾸준히 모여들었습니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차별을 ‘개인 대 개인’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권리를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 구조적 차별을 해소해나가겠다 호언장담하면서도 바로 그 구조적 차별을 해소할 핵심적인 요구들에 침묵하거나 퇴색시키는 정치에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구조적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이해시키는데 차별의 당사자 혹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느끼는 절망과 피로감이 그대로인 것은 아닙니다. ‘그건 아니지~’ 뚜렷한 퇴행 속에서도 언론과 시민사회, 대중들이 함께 나서서 소리 높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성/평등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사회적 합의로 진전시켜온 일련의 과정과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이 시점에 어떤 사회적 논의가 필요할까 정책담론팀의 고민은 깊어졌습니다. 언제까지 구조적 차별의 유무를 가지고 싸워야 할까? 지금 우리는 사회적 계층 균열을 충분히 혹은 의미 있게 포착하고 있나? 차별의 구조가 견고하다면 ‘기승전 차별금지법’이 아니라 차별금지법의 취지를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다른 대안들과 적극적인 연결고리를 탐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논의 필요성이 가장 부정당하거나 극도로 개인화되어 방치된 의제를 어떻게 ‘지겨움’과 함께 넘어설 수 있을까…? 서로에게 이런 질문들을 계속 던지며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차별과 불평등 해소는 ‘소수자’인 개인 혹은 집단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로 전환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응답이라는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도전해 온 구체적인 의제와 운동, 그 역사와 변곡이 보다 더 가시화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차별금지법 역시 ‘상징적인 원칙’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차별의 구제와 더불어 구조적 차별의 점진적 변화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그 의미와 효과, 제정 운동이 더 주목하거나 다른 흐름을 만들어야 할 쟁점이 무엇인지가 더 구체화될 필요도 있었고요.

오랜 남성 역차별 논쟁과 여성가족부 폐지 시도 속에서 자취를 감춘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의 의미를 성평등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평등화 정책으로 위치짓는 일, 노조법 2․3조 개정과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평등하게 일할 권리와 인간답게 싸울 권리를 연결하는 일, 전통적인 ‘정체성’ 구획이 아닌 사회경제적 지위로 인한 빈곤차별을 가시화하면서 공정과 능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다시금 사회권의 필요성을 길어올리는 일, 대구 이슬람사원 건립을 ‘지역문제’ 혹은 ‘주민갈등’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이슬람 혐오 및 인종차별의 역사 속에서 지역 및 국가의 책무로서 재설정하는 일, 차별과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한 다양한 기구들의 역할과 이를 견인하기 위한 다양한 운동 및 사회구성원들의 책임까지- 다섯 번의 토론회는 작년부터 우리가 계속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차별’에 도저해온 운동들을 더 적극적으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과 연결시키면서 평등의 방향을 조금 더 또렷하게 가늠해볼 수 있었습니다. (구조적 차별은커녕 차별이 없다고 우기는 사회에서 ‘차별의 구조’를 더 깊게, 혹은 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논쟁할 수 있는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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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은 ‘어떤 사회’의 상징인가


“사실 차별금지법은 상징에 불과해요.”

얼마 전 한 정치인의 인터뷰를 읽다가 이 문장에 눈에 들어왔습니다. 연속토론회를 이제 막 마무리한 시점이어서일까요, 뭔가 이 발언에 대한 반박…? 혹은 다른 현실인식에 대한 소명…?을 해야 할 것 같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습니다. (불과 얼마 전 ‘이제 할 말도 없다’고 울상을 지었던 1인) 물론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지지하는 정치인이었고, 반대하는 사람들과도 얼마든지 타협 지점이 있을 거라는 그의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법제도 그 자체 보다 차별과 평등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인식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가 긴요하다는 의견도 반차별 운동의 역사와 함께 진행되어 온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문제의식과 맞닿는 점이 있고요. 발언의 행간 역시 쉽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역차별’, ‘자유 박탈’, ‘민주주의 파괴’라는 보수개신교계의 극단적 언설을 경유해 제도정치의 방치 속에 놓인 세월만 16년이니까요. ‘찬성 vs 반대’라는 대립적인 구도를 벗어나 서로 다른 지향과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구체적인 쟁점을 두고 실질적인 논쟁과 협의점을 만들어가는 중차대한 일이 계속 미뤄지고 있는 상황은 21대 국회가 개원한 이래 제정 운동이 성토해왔던 현실입니다. 최근 대국회 투쟁은 이 과정을 열어젖히기 위한 것이기도 했죠.

하지만 여러 맥락을 고려해보아도 차별금지법이 상징에 불과하다는 의견에는 좀처럼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해가는 과정에서 여러 이해당사자들의 사회적 대화와 타협, 정치적 논쟁과 숙의가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차별금지법이 실질적으로 한국사회가 차별을 규율하고 평등을 진전시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수많은 ‘쟁점’을 담고 있다는 반증 아닐까요? 그리고 그 쟁점 하나하나는 법 앞의 평등을 선언하는 헌법 제11조의 문장이 아니라, 늘 당대 사회에서 새로운 차별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싸워왔던 당사자들의 언어와 요구가 축적된 결과입니다. 차별 현실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의 삶, 불평등과 차별의 구조를 ‘홀로’ 돌파해나갈 것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의 흐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실질적인 변화의 의미가 없다면 ‘차별금지법은 생존의 요구’라는 선언은 회자되지 못했을 테죠. 물론 누군가에는 상징, 누군가에게는 생존인 그 사회적 간극을 좁히는 것이 사회운동의 역할이라는 점만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분명한 건 자신이 경험한 차별을 직시하라고 한국사회의 뒷목을 잡아끌어 거울 앞에 세우려는 사람들의 싸움이 평등이라는 추상적이고 논쟁적인 가치를 구체적인 ‘상징’으로 만들어왔고, 바로 그 상징화의 결과가 제도의 꼴로 갖춰진 것이 차별금지법이라는 점입니다. 차별금지법의 효과가 선언적․상징적 의미에 국한되는가, 아니면 실질적으로 개인 및 사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도돌이표일 수밖에 없죠.

사실 차별금지법이 결국 평등의 원칙을 선언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기본법일 뿐이라는 이야기는 차별금지법을 필요로 하는 당사자 혹은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맥락이 있습니다. ‘가정 해체, 사회 혼란, 국가 붕괴’를 실제 슬로건으로 내건 반대 혐오선동세력이 있고, 거기에 부응하는 뻔뻔한 정치권력이 건재하니까요. ‘저기요, 세상 안 무너져요’ 불합리한 선동과 낙인찍기를 일삼는 보수개신교 세력을 상대화하는 전략으로서 차별금지법이 상징으로 자리매김 해 온 역사가 있습니다. ‘저기요, 최소한의 원칙을 세우지도 못하나요?’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면서도 아무런 행동에 나서지 않는 정치권력을 폭로하는 전략으로서 차별금지법이 포괄적인 사회적 요구의 상징으로 등장해온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제도정치 지형에서 더 집요하게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은 ‘차별금지법이 도대체 무엇의 상징인가? 누구의, 어떤 염원의 상징인가?’, ‘어떤 사회에서 차별금지법은 구체화된 역사적 요구로서가 아니라 추상적이고 탈역사화된 상징으로 형상화되는가?’와 같은 질문이 아닐까요?

평등을 향한 투쟁의 상징으로

“한국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의 현실을 바꾸어낼 수 있는 하나의 확고한 상징”
“하나의 법률을 입안하는 것을 넘어 국가가 차별과 혐오의 현실에 맞서 무엇을 할지를 묻는 투쟁”
- 박한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한국 사회가 혐오와 차별과 결별한다는 점을 ‘정치적’으로 확인하는 중요한 분기점“
- 홍성수(숙명여대 법학부)

연속토론회를 통해 짚어졌듯이 차별과 혐오의 유일한 대안이자 해법이 차별금지법이어서, 차별금지법을 통해서 차별의 구조를 지탱하는 모든 조건이나 주체들이 변화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 우리가 계속 실현해나가기를 원하는 평등의 크기가 딱! 차별금지법이라는 제도 만큼이어서 차별금지법이 한국사회의 상징이자 분기점으로 이해되고,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수많은 인권시민사회와 대중들의 참여로 확장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수세적 소명…도 지겹긴 합니다 ^^;) 평등을 향한 사회적 요구는 계속 반복되거나 새롭게 등장하고 또 변주되어 왔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금지법은 자신의 존재와 삶을 걸고 투쟁해온 이들로부터 얻은 사회적 경험과 지식에 기반하고 그 정수를 담은 제도라는 점에서 ‘상징’일 수 있습니다. 또한 거대 양당정치의 무능과 부작위가 평등의 원칙과 기준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의 행방에 대한 대중적 요구의 집약으로서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차별금지법이 또 무엇을 표지하고 상징하기를 바라며 움직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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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차별금지법이 계속 싸우는 사람들의 상징, 그 연대세력의 상징이 되면 좋겠습니다. 차별의 구조에 함께 맞서고자 하는 한, 그 상징을 실현해내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평등을 진전시킬 동료로 조직하는 것은 운동의 핵심 과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난 이후에도요. 제 바람은 물러설 수 없는 운동의 원칙을 실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사회적 논쟁과 타협의 맨 한가운데, 그 사람들의 존재와 목소리가 지워지거나 내쳐지지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타협을 승리의 일부로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반복되는 지겨움 속에서도 또 다른 승리를 위해 계속 싸워나갈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