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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들풀의 행진

박래군 인권활동가 구속이 의미하는 것

박래군 인권활동가가 구속되었다. 285리 평화행진 닷새째 날 새벽 그렇게 되었다. 벌써 두 번째 감옥행이다. 지난 3월 15일 황새울을 헤집고 있던 굴삭기 위에서 끌려 내려와 구속되었고 이번엔 평화행진 도중 끌려간 것이다. 함께 평화행진을 기획하고 진행했던 사람으로 그의 구속이 어떤 의미인지 진지하게 되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평화’에 덧씌운 불법 올가미

박래군의 구속은 평화의 구속이다. 멋 부린 표현도, 박래군에 대한 칭송도 아니다. 우리의 현실이 평화를 향한 소박한 행동일지라도 불법의 올가미에 걸려 구속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군기지 예정지 285만평을 285리 우리의 걸음으로 되찾자는 뜻의 평화행진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그 걸음 걸음의 수고로움을 피해갈 수 없다. 때문에 그 길은 수고롭지만 평등하고, 평등한 만큼 힘이 모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곧 보편적이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평화를 만들어내자는 평화행진이 구속을 감수할 만큼 ‘도발’적인 운동은 결코 아니다. 때문에 그 길에 어린이도 연로한 사람들도 기꺼이 동참할 수 있었고 재미있고 의미있게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어린이도, 청소년도 함께 한 평화의 걸음 <사진 출처: 285리 평화행진단>

▲ 어린이도, 청소년도 함께 한 평화의 걸음 <사진 출처: 285리 평화행진단>

박래군은 결코 도발적인 운동을 기획하는 사람이 아니다. 상인 테러 앞에서도 그는 너무 신중한 나머지 답답함을 자아내게끔 하기도 했고, 경찰의 봉쇄가 극심한 대추리로 향할 때조차 ‘구속’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가 무사안일한 걸까? 아니다. 평화행진이라는 ‘평화’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다. 박래군뿐 아니라 이런 자신감은 행진단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평화행진은 청와대를 시작으로 국방부, 정부종합청사, 수원비행장 경기경찰청, 평택구치소 등 4박 5일 동안 ‘반평화 오적’을 규탄하고 이들을 민중의 이름으로 소환하는 진지한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걸음이 보태지는 것만큼 즐겁고 신나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여갔다. 자정을 넘긴 시간 평택경찰서 앞으로 향할 때조차 행진단은 아무 걱정 없었다. 평화가 이렇게 쉽게 구속될 수 있다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행진단은 무려 45명이나 연행되었고, 19명 불구속, 1명 구속이라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위한 행진은 평화와 인권을 향한 구체적인 행동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에 지금 현 정부에겐 구속되기 십상인 ‘불온한’ 행동이었던 셈이다.


평화의 길 틀어막은 경찰의 장벽

박래군의 구속은 경찰국가의 발악이다. 평화행진은 구체적인 목적이 있었다. 지금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마을로 가려면 보통 2-3개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고, 무슨 일 때문에 출입하는지조차 심문당한다. 외부인이면 몇 시간 실랑이를 벌어야 하는 것이 보통이며, 웬만한 수완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한다. 몇 년 전 보았던 이스라엘 다큐멘터리 <체크 포인트> 그대로이다. 이스라엘 검문소 통과는 모든 수모와 인권침해를 동반한다. 조문을 가려고 해도, 병원을 가려고 해도, 심지어 학교를 가는 것조차 군인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날이 추워도, 더워도, 비바람이 몰아쳐도 군인들은 나 몰라라 상부의 명령만 기다린다. 지금 대추리 도두리 진입로가 그렇다.

전략적 유연성에 따른 전쟁기지 건설은 인권과 평화에 대한 사망선고이다.

▲ 전략적 유연성에 따른 전쟁기지 건설은 인권과 평화에 대한 사망선고이다.

7월 8일 저녁 주민들은 평화행진단과 즐거운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농활 온 학생들과 함께 탄 버스는 끝끝내 마을로 들어서지 못했고, 분노한 주민들은 하룻밤을 한뎃잠을 자야 했다. 행진단의 목적은 경찰의 벽을 뚫고 평화의 길을 내는 것. 우리의 완강한 저항이 깊어질수록 물리력에 의존하는 권력은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는 믿음에서이다. 그렇게 평화의 길이 열리면 예정된 강제철거를 막아내는 물꼬가 트일 거라는 희망을 걸고서 말이다. ‘평화적 저항권’의 실천은 이런 소박한 바람과 그것을 구체적 행위로 연결시키는 지점에서 만난다. ‘평화적으로 저항할 권리’를 천명하고 있는 유엔 인권옹호자 선언 12조는 국가가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국내법도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 정부는 ‘평화적인 저항 활동’에 깡패같은 경찰을 풀어 뭇매를 때리고 구속시켜 버렸다. 정부는 행진단의 항의행동이 불법이라고 딱지를 붙이지만 경찰력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자신의 ‘불법성’을 정의의 가면 뒤에 숨기는 짓이다. 정부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인 저항권은 마치 효모와 같다. 누룩이 숙성되고 확장되는 것처럼 저항의 실천도 그렇다. 자해의 고통을 감당하면서 ‘지문날인 거부 신념’을 지켰던 행진단원 김자현 씨의 행동이 저항이 숙성되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물리력 앞세우는 정부는 명이 다한 정부

박래군의 구속은 정부의 자승자박이다. 전략적 유연성 합의에 따른 전쟁기지 건설은 헌법에 반하는 것이라 이미 수차례 지적되었다. 또한 대추리 도두리를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설정하고 군병력을 상주시키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도 이미 밝혀졌다. 더불어 주민들에게 어떤 동의절차도 밟지 않고, 그들이 만들어 낸 농토를 강제수용하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배반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정부는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기는커녕 권력의 힘만 믿고 전쟁기지 건설을 밀어붙인다.

285리 긴 길을 걸으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행진단이 건네는 선전물을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 적지 않은 후원금을 건네는 사람, 잠자리를 제공하고 한 끼 밥을 대접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미군기지확장을 반대하는 것’이 결코 계란으로 바위 치는 무모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화행동은 이미 ‘국민 여론’에 싹을 틔우고 있었다. 오직 경찰과 군대, 강압적인 물리력만이 미군기지 이전을 밀고 갈 수 있는 동력이다. 군대와 경찰로 방패막이 하는 정부는 이미 그 명이 다한 권력이라는 것을 현 정부가 모르지 않을 것이다.

평화를 향한 평화의 행진은 들풀처럼 이어진다.

▲ 평화를 향한 평화의 행진은 들풀처럼 이어진다.

며칠 전 부안에서 류기화 님이 돌아가셨다.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한 <계화갯벌 여전사>에서 당당하고 활기차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니 맥이 탁 풀렸다. 백합 잡으러 갔다 바닷물에 휩쓸려 명을 달리 했다니! 갯벌을 안방 드나들 듯 했던 어부가 물때를 몰라서 갯벌을 몰라서 허망하게 갔을까? 생명이 드나드는 물을 기어이 막아 버리더니, 재앙을 자초한 것이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잘못된 정책은 사람의 목숨을 삼켜는 화를 부르고 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한미자유무역협정…. 재앙은 저벅저벅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평화행진은 들풀이다. 들풀은 아무리 씨를 말리려고 해도 방도가 없다. 황새울 들판을 철조망으로 둘러쳐도 그 땅에서는 여전히 생명이 자라 밥상을 풍성하게 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재앙을 막기 위해 오늘 서울에서 그리고 전주에서 행진은 다시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