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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⑤] ‘8090’ 중고등학생운동을 말한다

중고등학생운동의 역사를 되짚고 정리하는 좌담회

•일시: 2006년 9월 13일 •장소: 인권운동사랑방
•참가자
강주성 (80년대말 90년대초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총연맹) 지도간사, 푸른나무 무크지 기획, 푸른나무이야기모임)
구정인 (88-90 미림여고 직선제 활동, 90년대 참배움일꾼청소년회 활동)
권혜진 (87-88 석관중 직선제 활동,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
손영호 (87-91 고등학생지도)
유윤종 (현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전누리 (현재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사회 : 양돌규 (88년 벗사랑, 88-91 KSCM 활동)
정리 : 고근예

*87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중고등학생운동의 역사를 되짚고 정리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양돌규) 우선 87년을 전후로 학교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하다.

구정인) 87년에 중3이었고 상도여중에 다니고 있었다. 상도여중은 숭실대 바로 옆이었는데 87년 6월에 한 달 동안 데모를 내내 하니까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없었다. 선생님들도 수업만 들어오면 어떻게 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상도여중에 전교조 선생님이 많았고, 이런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한편으로 입시에 대한 부담도 컸다. 권위적이고 아주 억압적인 학교 분위기, 그리고 성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분위기에 대항해 수업거부를 했던 기억도 있다.

권혜진) 87년 6월 항쟁이나 이런 과정들이 과연 고등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쳤는가? 그런 게 핵심인데, 분명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당시 “군정종식”이라는 포스터가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나한텐 사실 영향이 있었다. 우리가 군부독재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선동적 포스터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런 것들 보면서 참 반했었다. 대통령도 직선제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고 그럼 학생회장은 누구지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강주성) 그때 노동운동이라든지 학생운동은 명확하게 계급계층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고등학생운동이 독자적으로 전체 사회에서 운동세력의 하나로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처음 시작을 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은 이전에, “고등학생들이 어리다.” “청소년은 주변인이다,” 이런 걸 많이 배운데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 이러한 개념규정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교육이 집단적 교육체제로 시작되면서 기인한 것이다. 그런 교육들이 내 머리 속이나 당사자들 머릿속이나 누구나 다 있었던 때다. 이러한 대상을 가지고 과연 이게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집단이 스스로 자기 운동 논리와 운동 힘들을 조직화해서 전체 운동의 한 부분운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이다.

손영호) 87년 같은 경우는 내 기억에 두 가지였던 거 같다. 그때 가장 큰 이슈가 사회민주화라거나 운동의 폭발적 성장과 고등학생 관련해서는 그 당시 연세대에서 있었던 86년 그 의식화편지 사건이다. 그게 의외로 좀 대학 내에서는 파장이 컸다. 이유는 대상이었다. 그전까지는 의식화 대상이라고 하면 대학생, 농민, 노동자, 뭐 시민.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등학생한테 넓혀졌던 것. 그 당시 내용은 별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시도한 자체가 신선했다. 그걸 겪으면서, 사회민주화운동 흐름에서는 청소년들을 의식화대상을 보는 그런 경향들이 하나 있었다.
또 하나는 그 당시에 교육민주화 운동이 가장 활발할 때였다. 대중운동 전 단계에서 소규모 운동이라든지 학내 교사 중심의 그런 것들이 기억에 많다. 85년-87년 오면서 급격히 늘었던 거 같고 교육민주화운동 측면에서는 교육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측면에서 교사들이 많이 고민했던 거 같고, 또 한 측면에서는 당사자인 학생들도 거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권혜진) 강주성씨나 손영호씨는 당시에 지도하러 들어오신 건데, 과연 고등학생들 삶의 문제로만 들어왔는가? 고등학생을 지도하러 들어왔던 사람들이 운동의 재생산을 위한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인지 묻고 싶다.

강주성) 있었다. 여하간 운동은 영역과 지평이 넓어야 하는 거다. 그런 점에서 고등학생들을 사회변혁의 한 세력이라고 본 거다. 그런데 그전 선배들은 고등학생들을 조기교육의 장으로 봤다. 그들의 기본적 관점은 고등학생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활동가의 재생산구조로서의 고등학생운동, 그런 관점이 많았다. 나와 손영호 씨는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나는 그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설정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들이 학내민주화라거나 자기 권리, 그리고 일련의 활동을 통해 사회에 대한 의식이라거나 인권에 대한 의식이라거나, 자생적인 운동적 자생력을 갖고 독자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기 바랬었다.

권혜진) 그때는 대학에 진학하면 용서가 되었는데, 안 가면 노동운동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화운동을 하고 싶었는데 배신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저히 소통이 안 되는 그런 부분들이 있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선배들에 의해 고등학생운동이 그 자체로 발전하는 데 저해되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강주성) 그건 선배의 한계라기보다는 그 시기 운동적 한계였다. 그때는 모든 운동판이 그랬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나마 진일보했다고 보는 건 그전에 고등학생운동한다는 고등학생을 보면, ‘대학생2’였다. 그건 고등학생운동이 아니라 대학생에게 영향을 받은 고등학생 몇몇이 그룹화되어서 운동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 전에는 소홀하게 봤던 직선제, 학내민주화, 보충자율학습 철폐, 문제교사에 대한 항의, 이런 것들은 대학생에게 교육받은 친구들이 관심이 없는 거였는데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운동을 끌어가고자 했던 것들은 일정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서고련, 고등학생운동이 있음을 알리다

양돌규) 87년 대선 이후 구로구청에서 투표함을 가지고 농성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 서고련이 결성이 되었고 명동성당에서 대통령선거가 부정선거라며 농성을 시작했다. 서고련 활동의 의의와 한계를 평가한다면?

권혜진) 사실상 서고련이 무엇을 외쳤는지가 많이 알려지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서고련이라고 하지만 서고련에 맞는 대표성을 갖고 모인 것이라기보다는 소모임 대표들이었고 서고련이라는 명칭에 걸 맞는 조직구성은 아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 이러한 모형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것, 그리고 당시 고등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각자 개별적으로 운동을 하던 과정에서 한곳에 모일 수 있던 최초의 시도가 아니었는가 싶다.

강주성) 연합체, 그런 간판을 걸 만한 조직 내용은 아니었고 이후 많은 친구들이 서고련이 갖는 운동 행태나 사고방식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단이 공식적으로 간판을 걸고 사회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고등학생운동사에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구정인

▲ 구정인

구정인) 세상에 고등학생운동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선포한 듯했다. 물론 대학생이 지도하는 너무나 대학생스러운 그런 거, 굉장히 낯설고 굉장히 운동권 같은 느낌을 많이 줬지만 그때 고등학생운동하던 친구들에게는 '꿈의 서고련'이었다. 우리도 저런 걸 만들어야겠다는 이야기를 90년대 초반까지도 했었다. 서고련은 명동성당에 잠깐 모여서 그 이후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게, 여러 평가가 부정적이었던 원인인 듯했다.

양돌규) 서고련의 문제가 서고련의 한계였나 고등학생운동의 한계였나?

강주성) 둘 다다. 서고련의 한계란 게 전체 운동의 한계가 나타나는 건데 고등학생운동이 그런 간판을 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학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손영호) 87년 대학로에서 가졌던 학생의 날 행사와 홍대에서 한 자살학생 위령제가 기억에 남는데, 고등학생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동료들과 함께 해결해 나가고 만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고련에 대한 기억이 많진 않은데 명동성당이라는 당시 상징적인 시위장소에 고등학생까지 왔구나하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왼쪽부터 양돌규, 유윤종

▲ 왼쪽부터 양돌규, 유윤종

양돌규) 최근에 서고련 활동했던 사람들은 만났을 때 하는 이야기가 서고련 깨지고 나서 88년초에 어디로 갈 것이냐, 서고련 맴버들 안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서고련을 가져가자는 쪽과 서고련을 가져갈 필요 없이 학교로 들어가자는 쪽이었다고 하는데, 계속 서고련을 이어가자는 쪽이 아까 말한 88년 7월 17일 자살학생 위령제를 주최한 그쪽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어떤 면에서 서고련이 전과 같은 선도적인 정치투쟁에서 방향을 선회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중운동의 길목

유윤종) “대통령부터 반장까지 직선제로..”라는 구호도 있었고, 당시는 학생회 직선제 요구가 굉장히 대중적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직선제 학생회에 대해 학생들의 호응은 어떠했나? 요즘은 학생회 법제화를 하자고 해도 학생들 대다수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 분위기다. “맞는 말이야” 싶어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위기는 아니다. 학생회 직선제는 과거엔 어땠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리고 간선제랑 직선제랑 차이가 궁극적으로 무엇이었는가? 당시 직선제 학생회가 제기된 게 그냥 대통령도 직선제니까 우리도 하자고 제기되었던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직선제가 필요하다고 느껴서 제기가 되었는가?

구정인) 딱히 직선제라기보다는 일단 대학교도 그렇고 80년대 중반에 학생회가 학도호국단에서 바뀌면서 학생회에 대한 의미가 부상된 것이 고등학교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일단 직선제를 하면 유세를 해야 하고 공약도 있어야 한다. 당시 학교에서는 써클도 못 만들었고 학생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직선제를 하면서 유세를 하고 교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어떤 학생회를 만들겠습니다, 공약을 내걸고 유세하는 것 자체가 큰 파장이었다. 대통령 선거의 영향으로 직선제와 간선제를 인식하는 건 민주냐 반민주냐의 느낌이 강했다.

권혜진) 학생회 직선제는 제일 싸우기 좋은 명분이었던 것 같고 당위적인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직선제 학생회가 어떤 의의를 갖느냐고 평가하는 것은 최근에 주장되는 학생회 법제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데 실제 간선제 학생회장과 직선제 학생회장의 권한 자이는 별로 없다. 그런데 지금 만약 학생회 법제화를 통해 학생회가 예산권을 갖고 운영위원회 참여해서 의견을 발표할 수 있고 권한을 가져서 공약이 헛공약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공약들이라고 한다면, 다시 한 번 민주적 학생회 건설이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 듯하다. 사실상 우리는 직선제는 이뤄냈지만 내용은 이뤄내지 못했던 면이 있다.

오른쪽부터 손영호, 강주성, 권혜진

▲ 오른쪽부터 손영호, 강주성, 권혜진



강주성) 개별 학교의 상황에 따라 많이 다를 수 있을 거 같다. 어쨌든 간에 88년도에 직선제 공청회를 KSCM에서 했는데 그때도 학생들이 많이 왔다. 그 이후에 직선제 학생회가 실제 이뤄진 학교가 상당히 많았다. 그런 것들은 어쨌든 일단 고등학생운동이 운동으로서, 대중운동으로서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대중들의 권리의식들을 함양하고 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

손영호) 현재 직선제가 별로 효용성이 없다는 건 권익을 위한 활동들이 활발하지 않아서 나오는 이야기 같다. 사실 당시 직선제가 이슈화된 것은 뭔가 주장하고 권리를 찾으려고 보니까 대표가 필요했고 대표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구정인) 학생회 법제화를 갖추는 것과 학생회를 잘 운영할 수 있는 주체들이 준비되어 있는가의 문제와는 좀 상관없는 별개의 문제라 생각한다. 그냥 자기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가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결국 그런 민주적인 훈련 과정에서 주체들을 생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윤종) 나는 학교 다닐 때 생각을 좀 다르게 했다. 소모임에서 학생회장과 접촉을 해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이 학생이 꼴통이었다. 그럼 우리가 학생회보다 학생 여론을 더 받아버리겠다, 그러면서 전단지 뿌리고 학생회보다 우리가 힘 센 조직이 되면 되는 거 아니냐. 좀 뭐랄까, 꼭 우리가 제도적 대표성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 지지라는 것은 투표해서 뽑힌 것과는 상관없다, 지지는 그때그때 받아내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을 했다.

양돌규) 시간의 흐름 만큼이나 학생회나 운동의 모델에 대한 생각은 좀 다른 거 같다. 대의나 대표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조직화를 역동적으로 해나가는, 운동과 흐름들을 중심으로 조직화의 상들을 가져 나가는 것 역시도 괜찮은 게 여기는데, 과거라면 그런 상상이 잘 안 되었지만 그게 요즘의 그것, 몸으로 짝짝 달라붙는 조직화의 상이 아닐까 한다.

구정인) 시대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처음 서고련 만든 것도, 당시 최고 조직은 전대협이었다. 학생회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은 아마 그런 상이 있지 않나. 학생회라고 하면 당연히 생각하는 게 학생들 요구를 대변하는 훌륭한 조직이라는 상이었다. 지금은 대학 학생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은 모든 학생회가 학생의 의견을 대변하는 훌륭한 조직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그때는 모든 운동하는 사람들이 학생회를 많이 해서 그런 상이 나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학생회에 과도하게 당시만큼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다.

89년 전교조 투쟁

양돌규) 89년에 이제 그야말로 기록적인 47만여 명 학생들이 전교조 사수를 위해 싸움을 대중적으로 벌였다. 그 당시 분위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구정인) 88년도 말에 학교 소모임을 처음 만들어 직선제 투쟁을 시작했고, 동시에 전교조 선생님 사수투쟁도 함께 했다. 직선제 투표가 89년 7월이었는데 전교조가 출범하고 탄압받던 때라서 학급에 유세를 들어가면 나오는 질문이 ‘선생님 해직되면 데모를 할 거냐 안 할 거냐’가 핵심이었다. 민주파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식이었다.

양돌규) 학교가 입시교육에 찌든 상황에서 전교조의 출범이 학생들에게는 다른 의미를 가졌던 것 같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기회로 여긴 것은 운동하는 고등학생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것 같다.

구정인) 전교조에서 말하는 '참교육'이 얼마나 눈물 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콩나물이 아니라 콩나무를 키우는 교육을 하고 싶다라고 했던 구호가 기억난다. 사회적으로 노동조합이라고 지탄도 받았지만 전교조가 학생들한테 지지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강주성) 학생들의 그런 지지와 참교육에 대한 호응, 이런 것은 전교조가 간판을 달고 한국사회에서 할 수 있었던 아주 중요한 요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걸 운동적으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건 전교조가 가지고 있는 한계다.

손영호) 교육이라는 것도 현장을 놓고 보면 어쨌든 교사하고 학생하고 학부모가 해결해야할 목표가 있다. 그 목표를 학교 단위의 모순들이 첨예화되었을 때는 오히려 대처하기가 좋았다. 분명히 학생들과 교사들도 동일한 입장, 동일한 현상을 갖고 논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학생들은 교육의 주체로서 진정 인정한다면 권리나 그런 것에 대해 더 자각을 했어야 하는데, 학생들의 자율적 움직임이나 권리 확보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한 것은 있다.

90년대 초반 고등학생운동의 숨고르기

양돌규) 91년으로 넘어간다. 91년 공안정국 후 고등학생운동의 하강, 소멸.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그렇지만 92년 93년 이때 분위기를 이야기해 보자.

권혜진

▲ 권혜진

권혜진) 개괄적으로 90년대 초반의 운동을 정의하자면 90년대 아이들을 가지고 80년대 방식으로 운동했다. 그래서 하향곡선을 그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90년대 초반부터 또 다른 고등학생운동의 흐름이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학생복지회 같은, 그런 학생 생활에 관련된 문제, 문화 이런 것들에 대한 제기가 조금씩 살아나면서 한바퀴 바뀌는 과도기적 상황이 아니었는가.

양돌규) 세대의 변화라고 한다면 91년 5월 투쟁 이후 92년이 되었을 때 고등학생운동의 바뀐 분위기라는 것도 한편 생각해보면 89년 전교조 사수 투쟁을 경험한 학년이 모두 졸업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권혜진) 그런 요인도 분명 있겠지만 사회전체가 바뀌는 흐름도 무시할 순 없다. 결국 89년 전교조를 겪었던 그 세대들이 마지막 불꽃을 피웠던 91년도 그 열정과 감동 그리고 패배. 그러면서 사실 그것을 더 연장시키고 싶고, 그 열정들을 더 다듬어서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싶던 게 오히려 더 발목을 잡는 시기였다. 실질적으로 그때 당시 고등학생운동을 지도하던 사람들이 그걸 겪고 나서 이제 고등학생운동에 전망이 없다고 다 떠나버리는 시기도 그때부터였다.

강주성

▲ 강주성

강주성) 그것은 기존의 운동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한계였다. 운동을 밑에서부터 가져 온 것이 아니라 멀리서부터 가져 왔기 때문이다. 실제 사람이 변화가 되는 과정도 의식이 변화가 되면 생활도 변화가 될 것이라고 봤던 게 많은데, 오히려 지금에 보면 운동이라는 게 삶에 천착해서 삶의 모든 부분에서 변화가 되고 그 변화되는 과정에서 생각들이 변화가 되고 오히려 이러한 과정에서 더 큰 집단으로 발전이 되고 대중운동도 된다고 본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때 많은 선배나 사회운동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중들 속에서 대중들이 요구하는 바에 의한 대중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대중운동을 거의 한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의식이 무너지고 이념이 무너지면서 모든 운동권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고등학생운동도 역시 쇠퇴한 것이다.

권혜진) 학교에서 사실은 중요하게 기반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게 학내 소모임인데, 소모임 활동이란 것도 졸업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강주성) 제일 큰 문제는 사실 학교별로 재생산 구조가 없던 거다. 너무 그 운동의 경험이 짧고 내용도 없는 상황에서 선배들이 떠나가면 선배들을 대체할 수 있는 후배 리더 그룹들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구조가 없었다.

구정인) 사실 그때 운동이 쇠퇴한 결정적 원인은 89년도 대중적 운동이 많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탄압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교조 교사들 해직 후, 집중적으로 학생들 징계가 정말 많았었고 동아리실이며 동아리를 아예 없앴다. 우리는 이런 징계를 철회시킬 수 없었고 또 무기력했다. 그래도 이후에 90년, 91년에는 어쨌든 학교활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전교조는 계기였던 것 같다. 계기를 통해서 그냥 일시적인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고 오히려 그게 조직화되어 있거나 의식적인 활동으로, 운동으로 정립되지 못하니까 결국 버티지 못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현실에 발 딛은 청소년 운동으로

권혜진) 결국은 자발적이고 자기 현장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 운동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자기 생활에 기반하지 않은 운동은 운동이 아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생이 통일운동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이런 게 있었다. 현재도 복지의 문제나 삶의 질 문제로 다가서야지 그렇지 않으면 고등학생운동이 유지되기 힘들다고 본다. 결국 자기 문제로 출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주성) 모든 개인이나 집단이나 경험하고 실천하는 속에서 의식과 실천의 수준이 죽 높아질 거다. 그런데 이게 어디까지 높아질 것인가. 자연스러운 과정은 높아지는 게 아니라 높아지다가 평면으로 가는 것이다. 이거는 운동이 아니다. 운동은 이렇게 평면으로 가는 과정에서 계기가 목적의식적으로 주어져서 터닝포인트로 전화가 되어야 한다. 질적 전화. 그것이 운동이다. 그런데 뭐, 복지나 이런 어떤 현장의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건 맞다. 운동으로서 맞다. 그게 기본이라고 본다. 과연 그럼 언제 통일 운동을 할 것인가? 발전하다가 어떤 적당한 기점에서, 잘 보고 통일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자기 계급의 이해에 그냥 빠져서 다른 모든 운동들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지금과 같은... 노동조합 운동이 환경운동에 관심이 있나? 노동조합 운동이 의료운동에 관심 있나? 그렇게 되었을 때 집단주의, 계급 이기주의적 운동이 되는 거다. 그런 면에서 고등학생들도 이후에 통일운동도 해야 되는데 문제는 지금의 수준이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일단 기본과 현실에 천착해서 운동하는 것은 맞다.

구정인) 정리를 하자면 그 시대가 확실히 남긴 게 있다면 세상을 바꾸는데도 청소년이 사회적 역할을 하게 되면 그것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그리고 청소년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청소년 시기에도 참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행복하고 자기 주장을 하고 자기 삶을 개척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 게 그때 운동의 힘이고 지금까지 남아 활동하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손영호) 학생으로서 인권이 있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쟁취해야 할 목표이다. 나도 아들이 있고 자라는 애들이 있지만, '왜 학생은 20년 동안 불행해야 해?'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학벌사회를 위한 희생이고, 사회적으로 계급을 무리 없이 편제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기도 한데,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이슈이다. 학생으로서의, 청소년으로서의 인권, 행복할 권리. 우리는 미래를 존재하는 인내해야 할 유보해야 할 삶이 아니다. 이거를 가장 중심적으로 봐야 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