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을 운동의 중심으로
복지권조합 교육담당자인 윌리 뱁티스트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빈민의 지도력을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홈리스였던 윌리는 “각 시기마다 불거진 문제들에 가장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투쟁의 선두에 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직면한 문제의 뿌리를 건드릴 수 없다. 오늘날 빈부 격차를 중대한 문제로 본다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운동의 지도적 위치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복지권조합은 가난하고 집없는 사람들의, 그리고 이들에 의한, 이들을 위한 다인종 조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복지권조합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복지수급자, 노동빈민, 그리고 경제정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조직하는 데 관심이 있으며, 학생, 여성운동, 변호사, 사회복지가, 예술가 등 다양한 조직과 연대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91년 4월 켄싱톤의 가난한 여성 집단에 의해 시작된 복지권조합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녀들은 당시 복지 삭감에 의해 그곳의 공동체와 가족들의 생존이 위협을 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다음 세 가지 기본적인 일들을 천명하며 뭉쳤다. 첫째,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해 발언하라. 둘째, 서로를 도우라.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 모두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얻으리라. 셋째, 빈곤 종식을 위해 광범위한 운동을 조직하라.
노예의 생활수준을 강제하는 근로복지
복지권조합을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의 관점이다. 윌리는 관점의 문제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 호에서 더 좋은 의자를 차지하려고 싸우지 말고, 그 의자로 타이타닉 호를 벗어날 수 있는 뗏목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이야기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현 제도는 그대로 둔 채 더 좋은 복지 혜택만 바랄 것이 아니라, 현 복지제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투쟁에 나서라는 뜻이다. 윌리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현 복지제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웅변한다.
“나는 홈리스였다. 가족과 함께 10여 년 동안 복지급여를 받았다 못 받았다 했다. 근로복지제도의 수급자로서 온갖 종류의 노동을 했다. 구세군, 눈치우기 등. 배관공으로도 일했는데, 정규직 배관공은 시간당 18달러까지 받았는데, 내 복지급여는 시간당 평균 2.5달러였다. 현 근로복지제도의 논리는 명확하다. 임금구조를 그 기초에서부터 파괴하고, 생활수준을 노예의 수준으로 강제하는 것. …… 이것이 오늘날 근로복지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복지국가의 전체적인 해체를 목격하고 있다.”
윌리의 지적은 신자유주의가 만개한 오늘날 미국의 상황은 물론, 노무현 정권의 참여복지제도와도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참여복지제도는 복지를 노동과 연계시키는, 즉 노동을 하지 않으면 복지 혜택을 주지 않는 미국식 복지제도를 본뜬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빈민의 인권을 찾기 위한 캠페인들
이런 관점으로 복지권조합이 주력하고 있는 운동 중 하나는 빈민의 경제적 인권 캠페인(Poor People's Economic Human Rights Campaign, 아래 PPEHRC)이다. 이 캠페인의 목적은 식량권, 주거권, 건강권, 교육권, 소통 및 생활임금의 권리 등 세계인권선언에 명시된 경제적 인권을 증진시킴으로써, 인종을 가로질러 가난한 사람들을 광범한 반빈곤 운동의 지도부로 조직하는 것이다.
◎ 행진: “미국 민중은 가난하다”
PPEHRC는 04년 8월 여성단체, 장애인단체 등 전국 60여개 조직이 참여하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대규모 거리행진을 진행했다. 이름 하여 「우리의 삶을 위한 행진: 국내에서의 전쟁을 멈춰라!」(March For Our Lives: Stop The War At Home!) 이 흐름들은 8월 3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맨해튼을 거쳐 매디슨 광장까지 이어지는 행진으로 모아지는데, 이날은 공화당 전당대회가 뉴욕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행진」의 목적은 공화당 전당대회에 맞춰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미국의 인민들에게 “미국에서 민중은 가난하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토론, 미디어, 노동시장, 복지명부에서 의식적으로 실종되어 왔다. 이는 이들을 홈리스, 배고픔, 실업과 의료보장의 사각지대로 내모는 ‘국내에서의 전쟁’과 다름없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PPEHRC는 「행진」 과정에서 수많은 빈민과 함께 학생, 사회복지사, 노동조합원, 변호사, 종교지도자들과 더불어, 지금은 식량, 주택, 의료보호, 교육과 생활임금이 보장되는 경제적 인권에 기반하여 미국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때라고 주장했다.
◎ 덤불촌과 빈곤현실 투어
「행진」 기간 동안 PPEHRC는 곳곳에 ‘덤불촌’(Bushville)이라는 텐트 도시를 만들었다. 덤불촌은 「행진」참가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빈민들의 존재를 좀더 가시적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덤불촌 앞에는 “덤불촌에 사는 우리는 치료도 못 받고, 이용가능한 주거도 없으며, 적절한 일자리도 없고, 음식도 충분치 않다”는 구호를 대문짝만하게 써 놓았다. 기본적 인권을 부정하는 정부의 정치적 경제적 정책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조용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외침인 것이다.
덤불촌에서는 인권감시를 위한 훈련이 진행되기도 하고, 전국에서 온 빈민들의 회합이 이루어지기도 하며, 각종 토론과 강연, 워크샵 및 공연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한 덤불촌은 ‘빈곤현실 투어 PPEHRC Realty Tour’의 출발지이기도 한데, 빈곤현실 투어는 빈민거리, 낙서벽, 복지관 등 빈곤과 관련된 장소를 이동하면서 빈곤현실에 대해 보고 듣고 느끼는 프로그램이다.
◎ ‘국내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
‘국내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Faces of the Fallen)은 PPEHRC가 벌이는 의미심장한 운동 중 하나다. 국내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이란 정부의 정책 집행 과정에서 이미 죽었거나 앞으로 생존하기 힘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운동은 사람들이 국내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사진을 들고 한 곳에 모여서 이들에 대해 증언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는 ‘철거를 위해 180일 이내에 집을 비워 달라’는 공지를 받은 사람도 있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병마와 싸우다 죽은 베트남 참전군인의 딸도 있다. 노숙인과 노동조합원 그리고 종교지도자도 나와 증언을 한다.
국내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발표되기도 한다. 이 보고서에는 의료, 주거, 교육, 적절한 일자리의 접근성에 초점을 맞추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침해 사례들이 담겨있다. 특히 이라크전 미군 학대 문제로 미국 정부가 자국의 인권 문제를 제대로 발표하지 않던 시점에서는, 미국의 인권침해가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국제적으로 분명히 보여줬다.
◎ 빈민대학과 경제적 인권 학교
‘빈민대학’(University of the Poor)은 PPEHRC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빈곤퇴치 운동의 지도자들을 통합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빈민대학은 설립 초기부터 전국에 걸쳐 존재하는 반빈곤 풀뿌리 그룹들과 교육방법을 공유했고, 미디어 전문가, 행위 예술가, 사회복지사, 종교와 노조 조직가들을 연결시켰으며, 전 지구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지식을 상호 교환하는 것을 촉진해 왔다.
지금까지 빈민대학은 PPEHRC 소속 단체들과 함께 수백 차례의 ‘경제적 인권 학교’(Economic Human Rights Organizing Schools)를 열었으며, 현재의 필요와 투쟁에 근거해, 빈곤퇴치 운동으로부터 축적된 고유한 경험으로부터 유용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훈련자 훈련과정, 원탁회의 기술, 그리고 비디오와 같은 행동 지향적인 수단의 제공 등……. 현재 예술문화학교, 노동학교, 사회노동ㆍ사회변화학교, 신학학교, 청년ㆍ부모 지도자 학교 등이 있다.
빈민대학 및 경제적 인권 학교는 ‘빈민 스스로가 빈민을 조직한다’는 원칙을 실현해 나가고 있는 또 하나의 운동 현장으로, 빈곤 당사자의 조직화를 강조하고 있는 한국의 반빈곤 운동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