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영등포역에서는 방화셔터에 깔려 두 명의 노숙인이 목숨을 잃었다. 몸을 뉘어 쉴 곳을 찾아 마지막에 닿은 그 자리는 결국 목숨을 앗아가는 자리가 되었다. ‘공공역사’라고 불리는 공간에서조차 인권의 박탈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인권을 몰아낸 자리에서 반짝이는 전광판과 바겐세일 광고는 ‘돈’을 불러들이고 ‘돈’의 권리를 부르짖는다.
17일 세계빈곤철폐의 날에 바라본 한국사회의 모습은 ‘빈곤철폐’의 희망보다는 빈곤에 짓눌린 신음소리로 가득하다. 빈곤은 인권의 총체적인 박탈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병든 사람들에게 ‘볕들 날’은 찾아오지 않는다. 병원비로 살던 집마저 날리기 일쑤다. 주거권의 박탈은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인들을 만들어내고 살만한 집에 대한 권리는커녕 죽지 않을 수 있는 집이 평생의 소원이 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거리에서 터져 나오기라도 할라치면 정부는 ‘평화적 시위’ 운운하며 집회의 자유를 원천봉쇄한다. 어디 이뿐이랴.
그러나 유독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권리가 있으니 바로 재산권이다. 재산권 앞에서 소외된 자들의 인권은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린다. 단적인 예로 금융피해자의 인권현실을 보자. 집을 빼앗겨 더부살이를 하는 이들이 절반을 넘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행여 일자리를 구하더라도 비정규직을 벗어날 수 없다. 이들이 빚을 지게 되는 이유가 채무액 기준으로는 ‘주택마련’, 채무건수 비중으로는 ‘병원비 부담’이 가장 많다는 점은 인권박탈의 악순환을 여실히 증명한다. 금융피해자의 인권을 짓밟으면서까지 보호하려는 권리는 과연 무엇인가. 소득 하위 20%의 금융자산이 14.3% 감소하는 동안 소득 상위 20%의 금융자산은 8.0% 증가했다. 아랫돌 빼서 윗돌을 굈더니 아래는 뻥 뚫리고 윗돌만 쌓여가는 형국이다. 사람답게 살 권리를 빼앗으면서 은행, 카드사의 재산증식만을 보장한다면 그것은 ‘돈’을 위한 권리일 지언정 인권일 수는 없다.
한국사회에서 빈곤을 특정계층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빈곤은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구조 전체의 문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재산권과 겨루어 이기는 권리는 없다. 의약품을 구할 수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보다는 제약자본의 이윤이 우선시되고 집 없는 이들의 고통보다는 토지와 건물로 재산을 쌓는 이들의 한마디가 주택 정책을 좌지우지한다. 가진 자들이 빼앗기지 않을 권리가 누군가의 권리를 빼앗을 수 있는 권력이 되고 있다.
인간을 위한 권리는 살만한 집, 아플 때 이용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의 보장, 평등한 교육 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집을 살 돈, 병원에 갈 돈, 교육을 받을 돈을 위해 권리가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러니 투자를 확대하고 규제를 완화해서 ‘돈’을 만들면 빈곤이 해소될 것이라는 착각은 버릴 때가 됐다. 또한 정부가 주장하듯 복지예산을 확충하고 목표치를 높게 잡는 것만으로 빈곤이 해소되지도 않는다.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구조가 무엇인지 정직하게 답해야 한다. 박탈된 인권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재산권을 인권의 목록에서 지우는 것이 그 정직함을 보증하는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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