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같으면 싫다고.. 집에서 그냥 텔레비전 보던지 동무들이랑 자전거 탄다고 했을 텐데, 웬일로 누나를 따라 나섭니다. 하긴 누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같으면 오히려 동수가 같이 가자 할까봐 묻지도 않고 혼자 갔을 텐데 말이지요. 실은 곧 있으면, 누난 필리핀으로 떠납니다. 영어 배운다고(어른들은 어학연수라고 하더라고요) 1년 동안 필리핀이라는 나라에서 지낼 거라고 합니다. 누나를 1년 동안이나 못 본다니… 게다가 다른 나라로 간다니… 동수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도서관, 진짜 오랜만입니다. 3학년 때 도서관에서 뛰다가 아저씨한테 혼난 이후로 처음입니다. 그런데 도서관이 참 많이 달라졌네요. 도서관 입구에서부터 기계가 줄지어 있는 것이, 좀 신기하기도 합니다. 누나가 컴퓨터 같이 생긴 그 기계를 톡톡 건드립니다.
“으응, 지금 주민번호를 입력한거야. 그래야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거든. 사실 아주 마음에 안 들어. 예전에는 번호표만 가져가면 됐는데… 굳이 주민번호를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여튼 여기저기 쓸데없이! 과도하게! 내 정보를 원하는 것 같다니까~”
동수는 누나가 하는 말이 뭔말인가 싶으면서도 궁금해집니다.
“필요하니까 원하는 거 아냐? 또 어디서 그렇게 누나의 정보를 원한다는 거야? 그리고 무슨 정보?”
누나가 물끄러미 동수를 바라보더니 이야기를 꺼냅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하는데 집주소가 왜 필요한거지? 심지어 직업이 뭔지 결혼은 했는지도 물어보잖아. 또, 안경 새로 맞추느라 약국 옆 안경점 갔더니 회원가입하라고 하더라구. 사은품 준다길래 가입하는데 주민번호도 묻는 거야. 그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좀 찝찝해. 내 정보를 어떻게 사용할지 누가 알아.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보들이 왜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말이지. 여하튼 자기 정보를 알려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건 조심해야 하는 것 같아.”
들어보니 그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생체여권 이야기는 정말……. 동수야, 생체여권이라고 들어봤니?”
동수네 누나가 들려주는 생체여권 이야기
(여권은 여권인데, 생체여권?) 여권은 누군가가 외국을 갈 때 ‘그 사람이 그 사람임’을 알려주는 신분증과 같은 거야. 혹시 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사람의 보호를 부탁하는 문서이기도 하지. 아마 여권 없이 외국을 여행한다는 건 위험한 일이겠지. 이러한 여권에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이름이랑 주소, 고유한 번호(여권번호)가 적혀 있어. 그런데 여기에다, 얼굴이랑 지문에서 뽑아낸 정보를 전자칩에 저장해 여권에 넣는다는 거야. 그래서 그냥 여권이 아니라 ‘생체여권’이라는 거지. 너가 너라는 걸 나타내는 네 몸의 정보, 생체 정보를 담은 여권!
(그만큼 좋아진 거 아닌가?) 물론 여권에다가 사람의 몸(생체)에서 뽑아낸 정보를 담는다는 건 기술적으로는 발전한 거겠지. 하지만 그런 기술이 발전하는 게 과연 좋은 걸까? 따져봐야 한다구! 생체여권을 찬성하는 이들은 우리의 안전, 즉 테러로부터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해. 하지만 이미 생체여권을 도입한 유럽에서는 실제로 해킹을 당해 사람들의 정보가 불법적으로 흘러나온(유출된) 적이 있어. 그래서 유럽의 보안전문가모임(FIDIS)은 생체여권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분명하게 밝혔어. 생각해봐~ 생체여권에 있는 너의 정보가, 너도 모르는 사이 해킹당해 누군가가 너인 척 사용하는 걸 말이지. 영화에서나 있을법한 장면이 진짜로 일어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기술이 발전하는 것만큼이나 그 기술이 어떻게 쓰일지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이 완전 중요해!
(그렇다면 테러는 어떻게 막아?) 그럼 내가 질문해볼게~ 그렇다면 생체여권으로 테러를 막을 수 있을까? 나라에서는 테러를 막기 위해 생체여권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생체여권과 테러는 별 상관이 없다고도 해. 왜냐하면 생체여권을 만든다는 건 우리나라 사람과 관련 있는 건데, 오히려 테러에 대한 걱정은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더 큰 편이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우리나라 오려면 생체여권이 필요하니 다른 나라에게 (생체여권 만들라고) 강요할 순 없잖아?! 한편, 만약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라 있는 누군가가 생체여권을 만들어 사용할 때, 그 사람을 테러리스트로 생각하며 여권을 통해 끊임없이 감시하는 건 옳은 일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
(그런데 왜 자꾸 생체여권을 만들려고 하는 거?) 그러게~ 왜 그럴까? 음.. 누구는 사람들의 정보를 많이 모아 컴퓨터에 가지고 있으면 편리하다고 생각하거든. 무슨 일이 생기면 ‘누가, 어떤 사람이 그랬나’ 즉각 찾아보기 쉽잖아?! 하지만 이건, 모든 이를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거랑 마찬가지라는 거야! 그래서 많은 이들이 ‘생체여권은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한다’고도 해. 다른 나라를 가고 싶으면 너의 갖가지 정보를 내놓고 가라는 거잖아?! 정보의 안전은 걱정 말라 하지만, 앞서 확인한 것처럼 해킹도 당할 수 있는데다가 오히려 내 정보를 나라가 어떻게 사용할지 누가 아냐는 거지!
생체여권? 감시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
누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도서관 문 앞에 있던 기계들이 다르게 보입니다. 아까는 좋아졌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기계들이 좀 차가운 괴물 같습니다. 정보를 먹고 사는 괴물. 이때 누나가 말을 잇습니다.
“음.. 누나도 필리핀 갈 여권 만들다가 들은 이야기야. 우리나라에서는 내년 7월부터 사람들한테 생체여권을 만들도록 할 거래. 그래서 어떤 이들은 생체여권이 만들어지면 안된다며 인터넷에 모임을 만들기도 했어. 이 사람들은, 여권이 더 이상 다른 나라를 자유로이 여행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감시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이 될 거라고 말한단다. 누나도 그렇게 생각해!”
문득, 동수는 그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덧붙임
아참, 생체여권 대응팀 Q&A의 도움을 많이 받았답니다. (생체여권 대응팀 http://biopass.jin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