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약이 없어서 죽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는다는 환자들의 절규. 그러나 의약품을 둘러싸고 어떤 문제들이 있어 약이 필요한 사람들이 먹을 수 없게 됐는지를 알기란 쉽지 않다. <인권오름>은 의약품의 연구, 개발, 생산, 공급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사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한국에서 의약품접근권 운동의 출발점이 된 의약품 '글리벡'. '불운의 스타 글리벡'이 들려주는 우여곡절 회고록을 통해 의약품에 대한 우리의 권리가 어디에서 가로막히고 있는지 살펴본다.
데뷔했을 때, 난 정말 내가 크게 뜰 줄 알았다. 물론 '21세기 최고'로 뜨긴 떴다. 악명높은 가격으로 떠서 문제지만. 사는 게 원래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하지만, 난 정말 억울하다. 구구절절 이야기하자면 한숨밖에 안 나오지만, 죄스러운 내 가격이 싫어도 나를 거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당신들은 내 이야기를 한 번 들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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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리벡은 왜 불운의 스타가 되었을까.
40년을 준비한 데뷔, 노바티스가 망쳐
1960년에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만성골수성백혈병과 관련된 염색체 이상을 발견했어. 연구가 이어지면서 백혈병의 원인이 되는 효소가 밝혀졌고 나의 데뷔가 준비되었지. 그 효소를 공략해 병을 치료할 약이 연구되는 데 30년의 시간이 걸렸다. 어떤 스타가 데뷔를 30년 동안 준비 하겠어? 그만큼 난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지지를 받고 등장한 몸이다. 그리고 1991년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나의 데뷔가 결정되었다.
물론 데뷔가 결정됐다고 바로 무대에 서는 것은 아니야. 오디션도 몇 번 참여하고, 리허설도 몇 차례씩이나 했다. 내가 21세기 최고의 신약 기술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완벽한 약의 모습으로 등장한 게 그로부터 십 수 년이 지난 2004년의 일이지. 1960년부터 2004년까지 40년이라는 무명의 시간을 거쳐서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을 때 그 기분! 요즘 극장가에서 섭외 1순위라는 변희봉 씨나 아시려나.
그런데 매스컴의 시끄러운 나팔소리에 잠깐 귀가 멀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이 없더라는……. 팬이 있어야 스타가 있는 법인데, 어찌 된 게 나는 팬이 한 명도 없는 스타가 돼있더라는 거지. 정말 눈물 나게 비참하더군.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원수 녀석, 나의 매니저에게 따져 물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이놈이 나를 두고 술수를 써서 사기 계약을 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종신 노예 계약서를 내 눈 앞에 들이대더라고.
그 원수 녀석의 이름은 '노바티스(Novartis)'라고 하니, 이 글 보는 사람들은 절대 잊지 마라. "노바티스는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인류의 생명을 연장하고, 인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놈이 사기 칠 때 자주 쓰는 말인데 절대 속지 말기를.
생각해보면, 노바티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수상쩍긴 했다. 스위스계 제약회사인 녀석을 처음 만난 때가 1991년인데, 데뷔가 결정되며 세상에 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나타나 치근덕거린 녀석이었다. 데뷔를 준비하던 30년의 시간 동안에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시장성', 즉 돈이 될 만한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가 얼마 되지 않았거든.
‘무시되는 질병’과 수많은 무명 스타들
나는 나중에라도 '시장성'이 입증되어 결국 21세기 최고의 신약 기술이라는 찬사를 받긴 했다. 하지만 나 같은 스타 하나 배출되기 위해서 수많은 무명 약들이 눈물 흘리는 게 또 이 바닥 생리가 되어버린 지 오래라, 별별 사연들이 다 있다. '무시되는 질병(neglected disease)'이라는 말 들어는 봤는지? 질병 사이에도 사농공상에 천출의 씨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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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세계 의약품 시장의 규모. 미국, 일본, 유럽, 캐나다를 합치면 81%다. 제약회사는 저개발국에서 약을 얼마나 파느냐에 관심이 없다. (출처 : 2001년 민중의료연합 여름아카데미 자료집)
수단에서 다섯 명에 한 명 꼴로 발병해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수면병 치료제인 DFMO의 이야기는 더 가관이다. 이 녀석은 신데렐라의 전형인데, 좀 우스꽝스러운 신데렐라다. 수면병을 치료하는 DFMO는 1999년에 무대에서 끌려 내려왔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약 팔아봤자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 그런데 어느 날부터 유럽 등지에서 이 친구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어 깜짝 놀랐지. 다른 매니저가 데려가 여성의 얼굴에 바르는 제모 크림으로 변신을 시켰더구먼. 그 순간에도 아프리카에서는 DFMO가 없어 수 천 명이 수면병으로 죽고 있었지. 세상에 얼마나 대단한 털이기에 사람 목숨 구하는 약이 털 깎는 동동구리무가 되어버리나.
이런 무시되는 질병들은 전 세계에서 발병하는 질환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어. 하지만 1975년에서 1999년 사이에 개발된 1,393개의 약물 중 오직 1% 만 이러한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다. 그래서 매일 35,000명의 환자들이 이러한 병으로 죽어가고 있지. 물론 그 사이에 털 없애는 약, 털 심는 약, 털 색깔 바꿔주는 약 등등 온갖 털 약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거고. 이제 "털보다 생명이다"라는 말이 필요할 것도 같네.
자기가 키웠다는 거짓말
이렇게 구린 사정 다 알지만, 나를 스타로 만들어주겠다는 데 거부하기 힘들더군.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게 죄일 뿐이지. 그래서 그 녀석과 1991년에 계약을 맺은 거다. 계약하면서 자기가 나의 데뷔를 확실하게 받쳐주겠다고 하더라고. 그 때부터 그 녀석 말을 의심했어야 하는데…….
노바티스는 나를 신약후보물질로 선정하기 위해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미국 국립암재단의 지원을 받은 오레곤 암센터의 과학자들과 연구를 진행했다. 노바티스는 지금도 자기가 나를 키웠네 마네 난리를 떨지만, 이것 보라고! 저 놈은 처음부터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쓰지 않았던 게야. 미국 국민들의 세금이 나의 데뷔를 위해 쓰인 거지.
이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약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데뷔하기 전인 2000년에 미국 국립보건연구소에서 발표한 자료가 있다. 이 바닥에서 전설의 판매기록으로 유명한 5인조 그룹이 있어. 멤버 이름은 각각 잔탁, 조비락스, 카포텐, 바소텍, 프로작이라고 하는데, 걔네들도 데뷔할 때 소속사에서 제대로 해 준 것은 없다는 거야. 개발 과정에서 투여된 공적 자금 비율이 77%에서 많게는 95%에 이르렀다고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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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많이 팔린 약 다섯 가지의 개발에 공적 자금이 투입된 비율. 77%에서 많게는 95%에 이른다.
그런데도 제약회사들이 마치 우리의 유일한 은인인 척 하는 것 보면, 북극에서 에어컨도 팔아버릴 천생 사기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뭐 우리 입장에서는 데뷔를 해서 팬들의 기대와 지지를 배신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데뷔하기 전에 노바티스 같은 녀석들이 뭐라 뭐라 뻥을 쳐대도, 세상에 나를 알리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눈엣가시쯤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환자들 생각하며 참고 또 참은 세월
그렇게 참아가며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데 노바티스가 중간에 갑자기 계약을 해지하자고 생떼를 써대는 거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이 녀석 눈에는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수가 많아 보이지 않았던 거고, 나의 시장성에 대해 계속 의심이 들었던 거다. 그래서 갑자기 나에 대한 개발을 포기하겠다며 배 째라고 누워버리는 것 아니겠어?!!
나도 그 때 무척이나 열 받았지만, 나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기분이었을 거야. 그렇게 녀석한테 공적 자금 들이부은 건 그만큼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인데, 이 녀석이 돈 부족하다고 강짜로 들이댔으니. 팬들에게 이렇게 스타를 망신시키는 소속사가 세상에 어디 있는지 몰라. 내가 그 때 낯부끄러워서 사람들 얼굴을 못 보겠더라니까. 데뷔를 준비한 시간이 아깝고 무엇보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계약서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도 없고, 녀석을 쥐어 팰 수도 없고……. 결국 2,000명이 넘는 환자들이 미국식품의약품안전국에 청원을 냈고, 덕분에 나는 1998년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받게 되었다.
데뷔할 수 있어 다행이긴 했지만 희귀의약품 지정은 노바티스한테 한 몫 확실히 안겨줬지. 정부가 노바티스에게 연구비 지원뿐만 아니라, 개발비용에 대한 세금 혜택 등 온갖 멍석을 다 깔아 줬다는 이야기지.
이 때 정말 소속사 바꾸고 싶었다. 툭하면 돈 없다고 배 까고 드러눕는 노바티스 같은 녀석을 누가 매니저로 삼고 싶겠어. 게다가 그 녀석은 돈에 눈이 멀어 나를 이 바닥에서 영영 매장시키려고까지 했지. 하지만 1960년 나의 존재가 예고된 그 때부터 나를 믿고 끝없이 기다려줬던 환자들, 그리고 얼굴조차 모르는 민중들을 위해서 데뷔 때까지만 참고 또 참자고 생각했어. 중간에 포기하면 아니한 것만 못하잖아. 참을 인(忍)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잖아. 하지만 참고 참으니까 오히려 노바티스 저 녀석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지.
녀석과 내가 맺은 불공정하다 못해 살인적인 종신 고리대 사기 계약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덧붙임
강아라 님은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홍지 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입니다.